[02] 세 번째 장 ( learning )
눈빛
초반으로 돌아가서 말이야.
너에게 꼭 물어보고싶은 게 있었거든.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짧게 나누었던 날.
대화가 끝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네 시선이 느껴졌던 날.
나는 살면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사람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물리적인 시선을 알아차리는 것에 유독 둔한 편인데도
네가 날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내가 모를 수가 없었어.
뭐라고 비유해야할지도 모를 만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도 모를 만큼
한동안 그 눈빛을 표현할 단어들을 찾아다녔다.
강렬함, 뚫림,진함, 진득함? 똑바른 시선, 선명한 시선, 분명한 시선...
아직도 그 시선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어.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너는 시선을 거둘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의 눈빛만으로도 몸이 뚫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거든. 너가 나 그렇게 쳐다본거 아니.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면서 용기내 물었다.
' 왜, 왜그렇게 쳐다보세요...? '
너는 내 말을 못 들은건지, 나에게 원하는 반응이 있었던건지
아니면 나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지
나를 쳐다보고있으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되려 더 뚫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쳐다봐서 나는 도망쳐버렸다.
그럼에도 하루종일 네 시선이 느껴져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날 나를 왜 그렇게 쳐다본거냐고 물어보고싶었거든.
물어보지도 못하겠지만
결국 대답을 못 듣겠지만.
고마운 것
너 때문에 힘들지만
네게 고마운 마음도 있다.
사랑이란 감정에 서툴렀던 나에게
너는 여러가지를 알려주었다.
나에게 보여주는 네 모습에게서도 배웠고
네 행동에 대한 나의 반응에서도 배운 것이 많았다.
다음번에는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거라고
혹시 네가 이미 마음이 떠난거라면
너와 나의 연이 결코 이어지는 결말이 아니라면
다음 번에 찾아올 사람에게는 더 잘해주겠다고
또 그런 눈빛을 마주하면 빨리 알아차려보겠다고
그런 일은 없길 바라면서도
너에게 배운 점이 많아서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고맙다.
직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점들 중 하나는
감이 좋다는 것이다.
예감을 포함한 직감.
그런데 이상하지.
요즘 네 모습에서만큼은
내가 틀리길 바라고 있다.
네가 설레게 할 때는 내 직감이 맞기를
네가 멀어지는 것만 같을 때는 내 예감이 틀리기를.
사람이 참 우습다.
사랑이 참 무섭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너무 진지하기만 하면 슬플까봐
장난을 걸어볼까 해.
세일러문을 알고 있니.
가끔 편하게 말하고 있는 너를 보면
오타쿠인가? 싶을 때가 있었거든.
사람은 입체적이니까.
네 모습에 오타쿠 한스푼 담겨있더라도
네가 하는 행동에 설레지 않는 건 아니였어.
네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글로는 참 쉽지.
편지로도 좀 쉽네.
근데 왜 너를 마주하는 순간에만
나는 왜 그렇게 너에게는 솔직하지 못한건지 모르겠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걸까 나는.
안하던 짓
너에게 설렌 후부터 말이야.
네게 반한 순간부터라고 정정할게.
아니지. 그 눈빛은 네가 먼저 내게 반한 거잖아.
그냥 네게 설렌 후부터라고 할게.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하게 되더라고.
사람이 사람에게 이성적 호기심이 있을 때
왜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게 됐거든.
네 덕분에 나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어.
근데 사실 말이야. 나 말고도 네 모습에서도 봤거든.
내가 알아차렸다는 걸 너도 알까.
그런 네가 너무 귀여워서 몰래 웃었다는 걸 네가 알까.
본능
너도 알지.
네가 먼저 느꼈던 긴장감.
너한테서 뚫고 나왔거든.
나도 이제는 알겠거든.
너를 볼 때마다 들던 묘한 기분이 뭐였는지.
네 눈빛이 왜 시작되었는지까지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제 6의 감각이 있더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 끌림.
그걸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정체모를 것이 느껴지는 건 알았지만
무엇인지는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네가 아니였다면
처음 본 사람에게서도
그런 긴장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거란 말을 하고 싶었어.
더 나은 사람
이건 너에게 가장 고마웠던 점이야.
너와 함께 하고 있으면
난 더 발전하고 싶어졌거든.
나는 원래도 발전에 목마른 사람이긴 했는데 말이야.
그건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거였거든.
근데 그 분야에 너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버렸더라고.
네 덕분에 모르는 분야를 습득할 수 있었다고.
네가 아니였으면 관심도 안 가졌을거라고.
그 분야에서만큼은 문외한이 되어있었을거라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을 넓혀 주어서
더 나은 사람으로 살고싶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싶은데.
꼭 하고 싶은데.
그 전에 전제조건을 달성할 수가 없다.
사랑
너무 솔직한 제목이지.
나는 한때 인터넷 밈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랑이 왜 자해지?
짝사랑이 왜 자해지?
나는 이제서야 200% 이해한다.
그것마저도
바보같이 네게 고맙단 말을 하고 싶어서
안달나있는 나를 좀 알아주라.
네가 아니였다면 영영 이해 못했을 문장이니까.
타이밍
사랑은 타이밍.
나 이제 이 말도 이해했거든.
망설이면 더 좋아하는 쪽이 힘들어지는 거라고.
기차는 이미 가고 없다고.
그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됐거든.
그러니까 또 네 덕분이라고.
그러니까
그 기차에 타지말고 나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준비
나 이제 준비 됐는데.
너랑 함께 할 준비 됐는데.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진심일 줄 모르고
네 속과 속도를 모르고
나는 최선을 다해 신중하게 준비했는데,
너무 오래 걸려버린 거냐고 물어보고 싶다.
네가 이미 상처를 받아버린 거냐고 물어보고싶다.
버려야할 것
사랑을 할 때 말이야.
무엇부터 버려야하는지 알았거든.
나에게 있어서는 신중함이었다.
상대방의 속도를 못 알아차릴 정도의 신중함.
그것마저도 네가 아니였다면 몰랐을테지.
적극적
나에게 돌진해오던 네 모습이다.
나는 사랑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너를 보고 배웠다.
비밀
그리고 하나 더 배웠는데 말이야.
이건 차마 글로도 솔직하게 쓰질 못하겠어.
너무 수치스럽거든.
앞으로 내가 무얼 해야하는지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