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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Apr 18. 2024

E2. 이집트

 오늘날의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동쪽에 있는 정방형의 나라이다. 이집트라는 이름은 수도였던 멤피스를 의미하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 이것이 당시 그리스(헬라)어로 음역(音譯) 되면서 오늘날에는 영어로 바뀌고 국제적으로 통용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나라나 민족을 ‘미르(Mir)’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인의 귀에는 이 말이 ‘마르’로 들린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국제적으로는 ‘코리아(Korea)’라고 통용되지만, 우리끼리는 ‘대한민국’이나 ‘한민족’이란 말에서 보듯이 ‘한(韓)’이라고 하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이집트는 ‘두 개의 나라’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집트가 상부와 하부로 나눌 수 있음을 보인다. 히브리어로 이집트를 ‘미츠라임’이라고 한다는데, 이 말은 쌍수 어미형을 지닌 단어로서 이집트가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명칭이다.

     

 지금부터 약 6,000년 전 이집트는 정치, 종교, 문화적인 정서가 서로 다른 나일강 삼각주의 하부 이집트와 나일강의 상류인 상부 이집트로 나누어졌다. 상부 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강 변의 좁고 긴 지역이었다. 하부 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그 후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부와 하부 이집트는 BC 3000년 무렵 상부 이집트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어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대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이집트의 통일은 이집트가 강력한 사회적인 힘을 갖게 되고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제1왕조, 제2왕조라고 하는데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 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때 이집트 문자 체계가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기원전 약 2800년경의 제3왕조에서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에서 나타났다. 제4왕조의 초대 왕과 그의 후계자는 대피라미드를 기자(Giza) 지역에 세운다. 제4왕조는 고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파라오의 왕권이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제5왕조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레’가 최고의 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제5왕조 군주들의 무덤인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인들이 벌인 대외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 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제11왕조(BC 2133~1991)와 제12왕조(BC 1991~1785)에 해당하는 중왕국 시대는 테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상부와 하부 이집트의 재통일도 이룩한다. 통일은 모든 계층의 이집트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왔으며,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당시의 파라오는 이집트의 내부 통일 후 바로 외부 원정에 나서 성공하였다. 이러한 원정의 책임자였던 사람이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이 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파라오들이 인간 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문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전에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쪽 외국인들이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힉소스라고 부른다. 아시아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 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를 제2중간기라고 부른다.

     

 제18 왕조로 시작되는 신왕국 시대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파라오가 열었다. 그는 힉소스의 세력을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부와 하부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 후 투트모스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번영은 아멘호텝 3세 시대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 이집트의 왕, ‘레’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의 모든 파라오 중 가장 논쟁이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의 신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왕국 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 등으로 확인된다. 제19 왕조는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히타이트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0 왕조의 오랜 평화 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 왕조가 이어진다. 제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상부 이집트 전역과 멤피스가 약탈되고, 외부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BC 663~332년의 후기왕조 시대는 이집트를 지배하던 아시리아인들을 무찌른 하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제26 왕조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대에 상업이 발달하고 해군력이 증강되었으며,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가 건설되었고, 특히 이집트와 그리스 사이에 교역이 발달하며, 그리스인들이 상인으로서, 왕가의 용병으로서 이집트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제27왕조 시대에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으나 이집트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외세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조각과 문학이 흥성했다. 페르시아 군주들의 암살, 사망,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전 등을 계기로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페르시아 봉기가 일어났고,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투쟁이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제28 왕조가 열렸다. 제29 왕조 시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세력 균형에 힘입어 이집트가 다시 국제무대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제30 왕조에서는 줄곧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제30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페르시아 군의 침입 저지에 실패함으로써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페르시아 군주들의 제31 왕조가 들어섰다.

     

 BC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가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나일강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BC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여,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많이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BC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야심적이고 보기 드물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에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등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당시 로마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 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 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와 성자 및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이 주를 이루는 콥트 문학이 이집트에서 발달했다. 이러한 시대는 AD 61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이집트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을 당하여 아랍화 시대(640~1517)를 거쳐 1798년까지 오스만 터키의 통치 시대를 경험하게 된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1801년까지 받는다. 이때 따라온 프랑스의 학자들에 의해 로제타 비문이 발견되고, 테베 지역의 고대 유물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된 장군인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는 이집트 정착 후 정치, 군사, 경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이집트 건설의 기초를 닦고, 수단을 정벌하고 팔레스타인 및 아라비아반도 파병 등을 통해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알리의 뒤를 이은 이스마일(Ismail the Magnificent, 1863~1879)은 수에즈 운하 건설 등 대규모 국토 개발을 추진함으로써 외채가 상당히 누적되었다. 1876년 외채 상환이 정지됨에 따라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는 공채정리위원회가 국가 재정을 관리하면서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2년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영국군은 카이로를 점령한 후 실질적으로 이집트의 국정을 수행하면서 이집트는 영국의 군사 통치를 받았다. 세계 1차 대전 중에 영국은 이집트를 자국의 보호력으로 선포하였고, 이에 반기를 든 범이슬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국제연맹에 가입하게 되는 1936년까지 영국의 실질적 지배를 받았다. 세계 2차 대전 당시에는 영국을 도와 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 대전 후에 이스라엘의 독립에 반대하는 아랍국가연합을 주도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1952년 나세르 중령의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서 왕정을 폐지하고 이집트 아랍 공화국을 건립하고, 1956년에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였다. 그 뒤 이스라엘과 여러 차례 전쟁과 평화협정을 반복하였으나, 아랍의 세계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지면서 현재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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