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촉

엄마에게 온 연락

by 레몬숲


거울에 비친 나의 눈동자가 보고 싶어진 날. 엄마께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월요일이 아빠 생신이라 몇 시에 올건지 여쭤보셨다.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하실 때마다 "왜 자꾸 싸우냐"라고 혼내셨는데 이날은 엄마의 목소리가 좀 많이 차분했다.


"어 엄마"


"너네 또 싸웠니?"


"응 또 그렇게 됐어. 이번 생신 때 오빠는 못 올 거 같아"


"그래? 그럼 너는? 너는 올 거지?"


"응 나는 가야지"


"그래 너는 와.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응 그럴게"


"아 근데 너 주말에 뭐 약속 있어?"


"아니 없는데 왜?"


"그러면 그냥 주말에 와. 일정 없으면 주말부터 있어도 괜찮잖아. 내일 저녁에 와"


"그래? 그러지 뭐"


"근데 너 주말에 없다고 xx가 뭐라고 하는 거 아니지?"


"응 오빠 집에 없어"


"아 그래? 알겠어. 그럼 우리는 내일 보는 거다?"


"응 내일 갈게"





나는 친정에만 다녀오면 그 인간에게 욕을 먹었다. 우리 집은 술을 좋아하는 집이라서 행사가 있으면 약주를 꼭 하는데 내가 집에 가는 날엔 엄마가 복분자를 준비해 두셨다. 원래 나도 캠핑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신앙을 갖고 나서부터는 좀 자제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그걸 너무 아쉬워했다.


우리 집에 인사를 가던 날, 엄마가 그사람이 좋아하는 간장 게장과 양념 게장을 한상 거하게 차려두고 복분자주를 준비해 두셨다. 엄마는 나에게 한잔을 따라주셨는데 내가 너무 그 인간 눈치를 보니 그 인간에게 "얘가 어디 나가서 술 마시고 다닐 애도 아니고 엄마랑은 괜찮지?"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받아먹으면 집에 가는 길에 신앙인이 어쩌고 욕을 받아먹을 것이기 때문에 몸이 안 좋은 척하며 안 마셨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었다.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지적받았기에 그냥 원하는대로 해주었다. 사소한 질문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감정표현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집에 있는 과자 하나를 먹어도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허락받는 패턴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 날에 엄마랑 같이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엄마 앞에 있는 반찬을 내가 계속 엄마한테 먹어도 되냐고 허락을 받으니까 엄마가 짜증을 냈다. "네가 애도 아닌데 왜 자꾸 이거 먹어도 되는지를 나한테 허락을 받냐 네가 먹고 싶으면 먹고 안 먹고 싶으면 안 먹는 거지." 라고.


엄마는 자식을 본능적으로 잘 안다. 내가 남 눈치 보고 그럴 애가 아닌데 엄마는 내가 점점 이상해졌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눈이 점점 풀려갔다고. 그런데 마침 또 그 사람이 집을 나갔고, 안 그래도 벼루고 있었는데 진실을 마주할 그날이 된 것이다.




집에 가니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과 술상을 한 상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말을 안 하니 술을 먹여서라도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보였다. 나는 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고, 그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엄마한테 말한다는 게 좀 비겁하다고 느껴졌다. 엄마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계속해서 물었지만 하도 답을 하지 않자 막내 삼촌네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엄마네 형제들은 자주 잘 모인다. 어제는 시골에서 김장하는 날이라서 엄마는 막내 삼촌 차를 타고 다녀왔다고 했다. 그래서 막내 삼촌네는 나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는데 내가 수면제 부작용으로 환시를 봤다는 말까지 했기 때문에 막내 삼촌이랑 숙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한참 놀 때 막내 삼촌의 아내인 외숙모랑 정말 친하게 지냈었다. 같이 캠핑도 가고, 옷 장사도 하고, 사촌동생(삼촌이 결혼을 늦게해서 사촌동생이랑 나랑 20살 차이남)도 돌봐주고 한동안 숙모네 집에서 살기도 했다. 숙모네 형제, 그니까 나랑 먼 사돈인 숙모 동생들 하고도 같이 놀러 다니고, 숙모 동생들의 친구들하고도 놀러 다니고 아무튼 좋은 추억이 많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에 간다 했을 때 엄마보다 더 반대했던 것도 외숙모였다. 당시에 나는 신문사에서 일했다. 외숙모는 "기술도 있는 년이 종교에 미쳤다"면서 정말 많이 속상해했다. 이해 된다. 내가 신학생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우리 가족 입장에서 '비구니'가 되는 거랑 진배없었으니까.


어쨌든 막내 삼촌네 동네쯤에서 전화를 하니 이자카야로 오라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술을 많이 마셨고, 사케 한 통을 다 먹었고, 취했고, 눈물이 흘렀다. 나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내가 겪고 있는 상황들에 대해서 말했다. 다 말한 것은 아니고 좀 필터를 쳐서. 그가 혼인신고를 했었던 것이랑 칼로 찌르겠다고 한 것은 얘기 못했다.


숙모는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왜 그동안 말을 안 했냐. 숙모 친구들 중에도 이혼하고 재혼한 애들이 더 잘 산다. 좋은 남자들 많은데 왜 이혼을 안 하냐. 이혼이 흠도 아닌 시대인데 왜 그러고 살고 있냐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 말고 평범한 사람 만나라고 그런데 너는 왜 이혼을 안 하냐고 물었다.


내가 "제가 선택했으니 책임을 져야죠.."라고 했더니 숙모는 이건 지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문제라면서 사람이 살면서 실수할 수도 있는 거라면서 속상해했다. 교회에 미치지 말고 너로 살으라고 말했다.


막내 삼촌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이혼 해야 된다고 말했고,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자카야에 나와서 막내 삼촌네서 3차를 한 뒤 찐고주망태가 되어 엄마와 택시를 타고 엄마네 집으로 갔다.


엄마랑 내가 집에 들어가자 두 남자가 방에서 나왔다.


엄마는 들어가면서 "얘 이혼시킬 거야."라고 말했고, 나의 만만만취상태와 눈물 범벅을 본 동생은 놀라서 "누나 왜 이래?"라고 말했고, 아빠는 "딸 왜 이러냐"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속상해했다.


나는 괜히 서러워서 대성통곡을 하다가 오바이트를 하다가 대성통곡을 하다가 오바이트를 하다가 가족들이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술에 취해 눈물이 가득한 채로 잠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를 선택한 것이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나를 굉장히 신뢰했기 때문에 처음 결혼한다고 했을 때 너무 이른 것 아니냐면서도 네가 선택한 것이니까 잘 선택한 것일 거라고 했다. 사실 가족의 울타리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이니까. 내가 좋다고 하니까. 그러니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얘기를 하질 못했다.


신학을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미 나는 충분히 가족들을 실망시켰는데, 더군다나 그 사람은 사역자인데, 안 그래도 교회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 때문에 상처가 있는 가족에게 내가 더 큰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가족은 가족이었다. 같이 있으면 서로 죽일 것 같다가도 어쨌든 내가 소중한 사람들인 것이다. 휴...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내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어져 있고, 보일러가 따뜻하게 틀어져있다. 숙취로 머리가 아파서 한숨을 크게 쉬는 소리에 동생이 와서 귀엽게 손을 흔든다. 밤새 내가 토한 걸 엄마가 치우고 씻기고 했다고. 자기는 엄마가 누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걸 치우는 걸 보면서 느꼈다면서 너스레를 떤다.


"누나, 나 사실 누나 오래 못 살 거 같았어"


"왜?"


"그때 상견례한 날 그 새끼 누나가 그러더라고. 조심해야 된다고. 그런데 누나는 그 새끼를 잘 다루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


"헐.. 근데 왜 말 안 했어!!"


"누나 ㅡ.ㅡ 그때 내가 말했으면 누나가 들었겠냐? 누나랑 사이만 더 나빠졌을걸?"


"아... 그런가. 야 그래도 말이나 해주지"


"누나 이혼해. 요즘 이혼 흠 아니야"


"그래? 네가 그리 말해주니까 고맙네"


"어 누나.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건데 누나는 그 새끼를 만날 사람이 아니야. 그니까 이혼해."


"근데 나 이혼해도 괜찮을까? 나 기독교인인데? 그리고 나 아직 그사람 좀 보고싶기도 해"


"누나. 나는 누나가 이혼 안 하고 그런 새끼랑 사는 것보다 이혼하고 누나 인생 사는 게 훨씬 좋아"


"(마음이 몹시 찡해짐) 씨..... 나 겁나 감동이야. 배달시켜"


일어나서 동생이랑 중국집 세트메뉴를 시켜 먹었다. 나는 매운 짬뽕을 먹고, 치킨이랑 피자를 시켰다. 과자랑 아이스크림이랑 초콜릿우유랑 탄산수를 사 왔다. 그러고 나서 본가에 있는 큰 TV로 강철부대를 다운로드하였다. 앞으로 완수해야 할 미션이 너무나 강력하다.


그리고 이날 이후 이혼행 고속열차를 탄 것처럼 상황은 급박하고 재미있게 흘러갔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크다면요. 하루쯤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 영상을 다운로드 하세요. 이상한 영상 말고 교훈이 있고 재미있는 것으로요. 하루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1차원적으로 살아보세요. 그렇다고 잊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래도 되거든요. 내가 겪고 있는 일이 잠시동안은 아무 일도 아니게 되거든요. 그러다 문득 내가 쉬고 있다는 생각에 위로받고 있을 거예요.


술은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시고요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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