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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유 Jul 20. 2024

내 친구에게서 낯선 향기가 느껴진다


세월아 네월아란 말은 날 두고 한 말일까


작년에 보고 올해 처음 보는 건가? 내 유일한 고등학교 친구. 이 친구와는 둘만의 사건 사고랄까. 희극에서 비극까지 밀도 짙은 추억들이 많다. 난 기억력이 엄청 좋은 편인데 이상하리만큼 고등학교 생활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뜨문뜨문 기억나는 당시 에피소드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도 바로 이 친구이다. 스무 살 무렵 둘이 가까운 곳에서 알바 하게 되었을 때 밤 열 시에 마치던 나는 자정이 다되어 마치는 친구를 자주 기다리곤 했다. 난 번화가 옷 가게에서 알바를 했고 친구는 당시 유행하던 회전 초밥집에서 알바를 했는데 친구 덕분에 그 비싼 초밥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엔 천 원부터 오천 원까지 접시 색깔에 따라 가격을 책정하는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시스템이었지만 이십 년 전만 해도 난생처음 보는 회전하는 초밥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게에서 친구를 기다린다는 명목하에 혼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고독한 미식가 스타일로다가 매번 열 접시는 거뜬히 해치웠다. 드디어 열다섯 접시를 달성한 날! 친구는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와 내 귀에 대고 그만 처먹으란 말을 했었다. ㅋㅋ 친구 눈엔 고독한 미식가는커녕 그냥 많이 처먹는 조금 부끄러운 친구일 뿐이었다. 예쁜 친구 덕에 주방 직원들의 서비스도 알밥, 김말이, 우동 등등 매번 스페셜하고 눈이 부셨다. 그걸 넙죽 받아먹고도 열다섯 접시를 먹었으니 그만 처먹으란 말이 나올 수밖에. ㅋㅋ 사실 내가 돈 걱정 없이 배 터지게 초밥을 먹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친구에게 받은 종이 한 장이 불러온 마법 같은 시간. 그 영롱한 티켓만 있으면 접시 색깔과는 무관하게 모든 접시를 단돈 천 원에 먹을 수 있었다. 무려 열다섯 접시라 해도 고작 만 오 천 원. 친구가 내게 그 티켓을 줄 때마다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러 열의를 불태우며 초밥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비록 초밥집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열의를 불태우며 친구를 따라나선다.




오랜 친구와의 공백은 무의미하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편안했다.      


“오빠가 알바 간다니 뭐라고 안 해?”


“오늘 밥을 다 차려놨는데 안 먹는다고 해서 다 버리고 옴.”


“진짜?? 오빠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겠지. 다 늦게 알바 한다니 맘이 좋을 리 없잖아. 아이고 네 마음도 말이 아니겠네. 아아 마시고 기분 풀어! 내가 쏠게!!”     


내가 지금 목이 타들어 간다는 걸 눈치챘나? 척하면 척이란 말은 얘를 두고 한 말일까. 친구가 사준 고귀한 아아를 단 세 모금에 원샷 때리고 드디어 알바 하러 간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동안의 모진 수모를 견뎌내고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주차장이라기보단 공터에 가까운 곳이었다.      


“저 골목으로 1-2분만 걸어가면 돼.”     


비슷하게 생긴 큰 컨테이너 창고들이 줄지어 서있고 마지막에 위치한 컨테이너가 오늘 나의 일터였다.      


“저기야.”


친구가 가리킨 창고 입구엔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남자는 친구가 내게 알려준 우리와 띠동갑인 직원 같아 보였다.      


“우열 씨 안녕?”     


친구가 인사를 건네자 남자는 환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목례했다. 두꺼운 안경 너머 보이는 꽤 큰 눈엔 생기가 돌았다. 나도 남자를 스치며 목례를 건네고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친구가 분명 과일 포장이라 했는데.. 과일 선물 세트 같은 것을 상상했던 나는 사뭇 다른 외관에 적지 않게 당황한 건 사실이다.      


“앞치마 가지고 왔어?”


“으응. 나 이거 도자기 공방 다닐 때 산 건데 이제 써보네.”


“그렇게 예쁜 건 필요 없는데. 장갑은 이거 끼면 돼.”


친구는 손바닥에 빨간 칠이 된 투박한 목장갑을 내게 건넸다.


“한 시에 오후반 언니들이 두 분 정도 더 올 거야. 오전엔 주로 박스만 접고 있으면 돼.”

 

엥? 박스라고라고라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겹겹이 쌓인 박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순간 친구는 내게 낯선 물건 하나를 건넸다.


테이프 커터기


“여기에 테이프를 끼우면 돼. 테이프는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은 투명 테이프로.”


눈으로 볼 땐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커터기에 테이프 끼우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왜 자꾸 거꾸로 끼워?”


나라고 거꾸로 끼우고 싶겠냐만 마치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삐걱대기만 했다. 방향감각을 잃지 말 것이 예전 나의 삶의 모토였는데 지금은 테이프 방향도 찾지 못하는 나란 인간. 시작부터 이러면 안 되지! 정신 차리자! 넌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야! 셀프 가스라이팅을 시작해 본다.

컨티라고 부르는 플라스틱 큰 상자를 두 개를 포갠 것이 지금의 작업대이고 거기에 박스 한 묶음을 올려 접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이게 4번 박스야. 박스는 세 가지가 있는데 제일 작은 게 4번 그다음이 3번 제일 큰 게 2번. 다른 건 한 묶음에 15개고 이건 20개. 내가 접는 거 보고 따라 접어.”     


친구는 빠른 손놀림으로 휘리릭 박스를 접더니 곧바로 바닥에 조심스레 던졌다.     


“접은 상자가 바닥에 쌓이면 이제 상자를 가지런히 정리해서 저기 저 기계 보이지? 저게 에어거든. 우린 뽁뽁이라 하는데 저걸 4번 박스엔 두장 씩 뜯어서 넣으면 완성이야.”     


에어쿠션 머신


말이 쉽지. 내 몸은 또다시 삐걱대기 시작했고 친구가 박스 세 개를 접을 동안 나는 겨우 하나를 접고 있었다. 내 손엔 너무 큰 목장갑이 손안에서 요동치고 어디까지가 내 손가락인지 알 수 없었다. 답답함에 목장갑을 벗어던지고 박스 접기에 돌입했다. 커터기 칼날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번쩍였지만 속도는 조금 빨라지는 거 같았다. 커터기 속 테이프를 잡아당기면서 몇 번이고 왼쪽 엄지손가락이 베였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도로 장갑을 꼈다. 다시 느림보 모드로 전환. 친구 덕분에 박스는 순식간에 쌓이고 그다음 둘이서 쭈그리고 앉아 수북이 쌓인 박스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쭈그리고 앉는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일어서서 숙이고 하는 것보다 허리가 덜 아프다고 친구가 알려주었다. 경력직의 지혜랄까. (친구도 이제 고작 3주 차) 그러고 나서 친구는 박스 위로 뽁뽁이를 두 장씩 쉬지 않고 사정없이 뜯어댔다. 뽁뽁이는 선풍기 바람에 날려 나풀대기 시작했고 마치 박자를 맞추 듯 뽁뽁이를 두 장씩 뜯어대는 친구의 손은 마치 빨리 감기를 한 것만 같다. 아. 멀미가 난다. 날개가 있다면 저런 것일까. 마치 내 친구가 일터를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너도 한 번 뜯어봐.”     


가만 보자. 점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한 장이고 어디까지가 두 장이란 말인가. 세월아 네월아란 말은 날 두고 한 말일까. 아. 비닐 뜯는 것조차 못 하다니. 절망적이다.      


“이리 줘. 내가 할게!”      


친구의 음성은 다정했지만 내가 내 친구를 모를 리가 있나. 느려 터진 속도에 속이 터져 뺏어간 게 분명했다. 가지런히 정리된 박스 위로 뽁뽁이가 수북이 쌓이자 친구는 양손 신공을 발휘하며 제집 찾아주듯 박스 안에 뽁뽁이를 잘도 끼워 넣었다. 마치 철사장을 연상 캐 했다. 오랜 친구에게서 낯선 향기가 느껴지는 순간 이층에서 누군가 빠르게 뛰어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인사해! 우리 대표님."


“아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웃는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다. 어디서 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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