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이 익는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불특정 다수가 북적이는 백화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면 이런 말은 간혹 보단 많고 줄곧 보단 적게 그냥 적당히 들으며 지내게 된다. 누군가 내게 이 말을 건네는 이유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다단계를 하는 사람부터 친근감을 유발해 할인을 표하는 사람, 진부한 작업 멘트를 날리는 사람까지 낯이 익는데?라는 말은 서서히 내 맘속에 부정적인 말로 자리 잡아갔다.
내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고 있다니.
‘어디서 봤더라? 진짜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어디지?’
어쩜 그동안 내게 낯이 익다 한 사람들도 불순한 의도보단 진짜 낯이 익어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아니면 내 얼굴이 엄청 흔하게 생긴 얼굴이거나.
그렇게 미스터리로 남은 대표님과 짧은 대면을 끝내고 박스 접은 지 한 시간 만에 4번 박스는 창고 한 벽면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줄지어 정리된 박스를 보고 있자니 마치 집 안 청소를 끝내고 깨끗한 거실을 바라봤을 때처럼 순간적으로 마음의 평온이 나를 찾아왔다.
온몸이 나른해지려던 참에 드디어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제 참외 포장을 할 건데 내가 말하는 킬로에 맞게 박스 안에 넣어주면 돼. 그럼 내가 빨간 테이프로 밴딩하고 송장 붙일게.”
그렇다. 오늘 내가 알바 하러 온 곳은 과일 선물 세트를 포장하는 곳이 아닌 과일 택배를 보내는 곳이었다. 온. 라. 인. 쇼. 핑. 몰! 과일 몇 상자를 옆에 두고 점잖게 앉아서 포장하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이럴 수가! 내게 정신 차리라는 듯 창고 안으로 노란 지게차가 들어왔다.
“참외 원물 들어갑니다!.”
노련하게 지게차를 몰던 아까 본 띠동갑 남자 직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목례만 했는지라 처음 듣는 음성에 흘깃 시선이 그리로 향했고 내가 상상했던 과일 몇 박스는 무슨.
팔레트째 내 키보다 더 높게 쌓인 과일 박스들이 산을 이뤄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참외 한 박스에 10킬로. 박스 째 들고 작업대에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무거운 걸 많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요령이 있을 리가 있나. 살다 살다 내 팔에서 힘줄을 볼 줄이야. 손목부터 팔 어깨 허리 뭐 하나 힘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이건 분명 내일 몸살 각이다.
아까 접은 박스를 작업대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하나씩 가져다가 저울 위에 올린다.
“박스 올렸으면 거기 저울에 영점 버튼 보이지? 그걸 눌러서 0을 맞추고 원물 넣으면 돼! 원물 상태 확인하고 썩은 게 있으면 따로 빼놓고 깨끗한 것만 넣어줘!”
친구 말대로 박스를 올리고 영점을 잡았다.
드디어 고객님 식탁에 올라갈 싱싱한 과일을 제가 선별해서 안전하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박스 말고 새로운 업무에 가슴이 뛴다.
참외를 양손에 집어 들고 손목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참외 상태를 살핀다. 막내 형님네 시댁이 성주에서 참외 농사를 크게 해서 매년 받아먹기만 했지. 참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던가. 어김없이 미간에 내 천(川) 자 주름이 드리우고 한참 참외와 눈을 맞추던 그때 참다못한 친구가 내게 한 마디 날렸다.
“친구야! 참외 공부를 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 언제 넣어줄래?”
이번에도 친구의 음성은 다정했지만 소싯적 눈칫밥이라면 일가견이 있던 나는 내부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장 속도를 내야만 한다.
“으응. 알았어용~~ 잠깐만 기다려 보~~ 세~~ 요 오~~”
방금 뭐지? 내 입에서 노동요 같은 게 튀어나온 거 같은데? 아, 아니겠지! 그럴 리 없어. 티브이에서만 본 아줌마 아저씨들이 노래하듯 말하는 걸 내가 했다고? 아님 너무 집에만 있다가 밖에 나와서 신이 난 건가? 그래. 그렇다고 해두자!
드디어 요리조리 잘도 살핀 참한 참외가 손수 접은 박스 안으로 입장한다. 엥? 좀 이상한데? 세 개를 넣으면 900그램, 네 개를 넣으면 1100그램이라 도저히 일 킬로를 정확히 맞출 수가 없는데? 아.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또 생각지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참외 크기를 바꾸거나 친구에게 물어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참외 하나를 들고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다. 내가 진짜 미친 건 아니겠지? 아직 하나도 못 싼 나를 바라보던 친구가 더 미쳐갈 판이었다.
“네 개 넣어주면 돼! 1킬로보다 작게는 안 되고 많이 넣어줘!” (눈치 빠른 녀석)
“예~~ 네 개 넣어 드릴 게~~~ 조금만 기다리세요오~~~”
또 미친 노동요가 방언처럼 튀어나왔다. 이 일은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는 거 같다.
날 나무늘보보다 더한 느림보로 만들며 미친 노동요 가수로 만들고 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우당탕탕!! 아까 대표님이 내려왔을 때와 같은 철계단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창고 안에 요란하게 울렸다. 아까 그 띠동갑 남자 직원이었다.
“오늘 점심은 국밥으로 할까 하는데 뭐 드실 건가요?”
“전 순대요!”
“저도 순대 국밥이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다 순대로 시키겠습니다!”
남자 직원은 나이에 비해 사람을 대할 때 어색함이 전혀 없어 보였다. 능글맞다는 표현보단 유하다고 해야 하나. 웃는 모습과 목소리 톤이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나도 일 한지 3주밖에 안 됐지만 여기 사람들이 엄청 좋아. 다들 순하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다 착해! 그래서 좋아.”
사람 볼 줄 아는 친구가 좋다면 정말 좋은 사람들이겠지. 순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나도 순한 사람이 되려나. 너무 어릴 적에 사회에 나왔던 나는 자주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다.
거기에 기 센 사람들은 다 모인 패션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어디서나 전투 모드 장착. 두 눈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날 선 사나움을 품고 살았다. 그걸 걷어 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날 많이 융화시키고 진짜 내 모습을 찾아준 건 남편과 아이였다.
삼십 년 가까이 내가 알고 있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고 변화된 내 모습을 어색해하는 주변인들도 많았다. 무슨 재미로 사냐는 말을 간혹 듣곤 하지만 예전보다 인생이 더 재밌다면 믿겠는가. 오늘 아이와 남편의 아침밥만 차렸지. 아무것도 못 먹고 온 탓에 뜨끈한 순대국밥이 간절하다. 이 시간에 독서실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의 국밥 파뤼라니.
내 인생이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 오늘도 너무 재미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