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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유 Aug 03. 2024

하마터면 현타가 올 뻔했다.


과거는 다 거짓말이고
미래는 환상일 뿐이라고


“식사 하십쇼!!”      


정신없는 참외와의 씨름 중에도 내 후각은 이미 뜨끈한 국밥이 도착했음을 눈치채고도 남았다. 킁킁. 한 번도 냄새를 잘 맡는다던가 개코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지만 시장이 반찬만은 아니었다. 찰나의 냄새도 절대 놓칠 수 없지. 시장은 내 후각에 제2의 인생을 열어주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국밥 파뤼를 고대하며 이층 사무실로 향한다. 낡은 철계단은 뛰어 내려올 때만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게 아니었다. 그저 걸어 올라가는데도 쿵쿵대는 소리는 소란스레 창고 안을 울렸다. 혹시 무거울수록 쿵쿵 소리가 더 크게 나는 걸까. 다시금 구름 위를 걷듯 사뿐사뿐 발걸음을 떼 보지만 소용이 없다. 아휴 지금은 철계단을 신경 쓰기보다 국밥이 식기 전에 재빨리 올라가는 게 상책이다. 쿵.쿵.쿵.쿵  

어렵게 마주한 이층 사무실 풍경은 허연 형광등 아래 스타트업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어지러운 책상 두 개가 마주 보며 붙었고 어릴 적 아빠 사무실에서 본 듯한 짙은 색의 목재 팔걸이가 인상적인 까만색의 일인 소파가 두 개씩 짝을 이뤄 우직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그 중간엔 레트로 무드로 무장한 초록 상판에 유리가 깔린 테이블이 놓였고 그 위로 검은 뚝배기 네 개가 단출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대표님과 띠동갑 남자 직원은 이미 자릴 잡고 앉아있었고 친구와 나도 맞은 소파에 착석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짧은 인사 후 어색한 기운이 감돌자 띠동갑 남자 직원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은 TV를 급하게 켰다. 그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건 TV만큼 좋은 게 없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여덟 개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TV 화면에 박혔고 어느 정도 TV 소리가 사무실 안을 메우자 차츰 심신은 안정되어 갔다. 그제야 뚝배기를 감싼 랩을 샤라락 뜯고 뜨끈한 국밥을 후루룩 한 숟갈 뜨자마자 미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 흘렀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늘 아침부터 일어난 모든 일이 꿈이었고 이내 잠에서 깬 것만 같았다.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과거는 다 거짓말이고 미래는 환상일 뿐이라고. 아이를 낳기 전 치열하게 쌓아온 내 커리어는 모두 거짓말이고 미래에 간절히 꿈꾸는 작가는 환상일 뿐이며 지금 낯선 곳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순대국밥을 먹고 있는 내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같이 밀려왔다. 푸른 바다의 잔잔한 파도가 아닌 검은 바다의 성난 파도 같았다. 제일 먼저 내게 밀려온 건 서. 글. 픔이었다.

나도 모르게 먹어버린 나이가 괜스레 서글픈 걸 시작으로 츄리닝에 앞치마를 두른 내 차림새도 서글프며 6만 원 벌겠다고 아침부터 남편과 다투고 나온 것도 서글프다. 서글픔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전에 어서 이 성난 파도에서 헤엄쳐 나와야 한다. 아니면 내가 정말 성이 날 것만 같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행히 아무도 내 감정의 소용돌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국밥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서먹함을 이기려 틀어 놓은 TV에 갈 곳 잃은 내 시선을 고정하고 손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으며 입은 열심히 저작운동을 해댔다. 그 결과 힘겨운 감정의 파도와 싸웠다고 하기엔 잘 먹어도 너무 잘 먹었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편했어도 예의상 조금 남긴 국물은 깨끗이 사라졌을 테다. 여긴 분명 국밥 맛집이 틀림없다.

배가 부르니 좀생이 같던 마음에도 살이 쪘는지 조금은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졌다. 츄리닝  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시급 만원의 오늘의 내가 진짜이면 좀 어떠한가. 그럴 수도 있지. 오늘 용기를 못 냈다면 서른여덟 알바생이 아니라 서른아홉, 마흔의 알바생이었을 텐데.      


“어땠어? 난 국밥 괜찮던데?”


“응 나도 괜찮았어. 맛있더라.”     


친구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난 분명 서른여덟 알바생은 꿈도 못 꿨을 테다. 울적한 기분이 들 땐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럼 학창 시절처럼 마냥 웃다가 하루가 지나가겠지.




국밥 파뤼를 끝내고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땐 처음 보는 사람 두 명이 있었다. 친구가 말한 오후반 알바 같았다. 친구는 유독 한 사람과 반갑게 인사했다. 3주간 같이 일했던 언니라고 했다. 옆에 있는 언니는 나와 마찬가지로 오늘이 첫 출근이라고 했다. 괜한 동질감에 처음 보는 언니에게 너무나도 활짝 웃어버렸다. 꽃이 만개하듯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웃다가 밀려오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난 극 I인데 잠시 E가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와. 위험했다. 하마터면 현타가 올 뻔했다. 

쿵. 쿵. 쿵. 쿵. 띠동갑 남자 직원은 어김없이 철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송장 드릴게요! 누님들은 (우리) 아까 하시던 거 계속해 주시면 되고 누님들은 (오후 알바) 참외 2킬로 부탁드립니다. 여기 송장이요”     


맙소사. 누님이라니. 누가? 내가? 어릴 적 TV에서 제비들이 돈 많은 사모님을 꼬시려 누님 누님 하는 건 들어봤어도 내가 누군가의 누님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누군가에게 누님이 될 수 있는 나이. 서른여덟은 내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오후 알바 언니들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비장하게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바로 작업 장갑이었다. 킁킁. 우리가 낀 빨간 목장갑과 사뭇 다른 전문가의 스멜이 느껴진다. 우리가 출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알바 언니들도 박스 접기부터 시작했다. 참외를 넣으며 안보는 척 흘깃 훔쳐봤는데 친구와 같이 일했다는 언니도 철사장을 연상 캐하는 손놀림으로 휘리릭 박스를 접어댔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이제 내가 원물 넣을게. 네가 이거 한 번 해봐. 빨간 테이프로 테이핑 하고 송장 붙이고 팔레트에 차곡차곡 쌓으면 돼! 여섯 개씩 네 줄. 할 수 있지?”     


“응! 해볼게!.”     


참외와 고군분투 중인 내가 짠해 보였는지 친구는 내게 새로운 미션을 주었다.

여섯 개씩 네 줄. 여섯 개씩 네 줄. 친구가 알려준 걸 되뇌며 친구가 반쯤 쌓아놓은 팔레트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때 오후 알바 언니들도 박스를 다 접고 참외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스멀스멀 알 수 없는 승부욕이 발동했다. 저 언니들보다 빨리 박스를 쌓으리라. 내 형편없는 실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것은 무모한 욕심에 불과했다. 저쪽은 첫 출근 한 언니가 참외를 넣고 철사장 언니가 박스를 테이핑 하고 적재한다.

우리 쪽은 이미 반쯤 쌓인 팔레트라서 정정당당은 아니지만 흥미진진한 경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의 고독한 레이스가 시작된다. 자. 준비하시고 시-작!!

친구가 빠른 속도로 내게 참외를 넣은 박스를 토스하고 난 빨간 테이프로 테이핑을 한다.

맘 같아선 촥-촥 인간 커터기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박스 접을 때와 다를 바 없는 형편없는 내 실력으론 도저히 친구가 토스한 박스를 다 쳐내기엔 역부족이다. 아직 송장을 붙이지 못한 박스들이 내 오른쪽에 쌓이고 왼쪽엔 친구가 토스해 준 참외가 든 박스가 밀렸다. 이제 겨우 박스 여섯 개를 적재했고 흥미진진한 경기는 커녕 정신이 아득해지고 또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보다 못한 친구가 빠른 속도로 테이핑을 하고 난 느려터진 속도로 송장을 붙이고 또 붙인다. 아! 적재도 해야 하지. 박스를 세 개씩 모아들고 팔레트로 향한다.

헉헉 소리가 절로 나고 밖은 푸르른 오월이지만 내 몸은 끈적한 땀으로 샤워 중이다.      


“헉헉 얼마나 쌓아?”


“열 칸 쌓으면 돼! 240개가 한 팔레트!”      


열 칸이라고라고라? 내 키를 훌쩍 넘긴 높이에 까치발은 기본이고 맘 같아선 공중부양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레이스 따윈 잊은 지 오래고 옆을 경계할 기력조차 없다. 그래도 정신없이 박스를 쌓다 보니 드디어 한 팔레트 완성!! 자 지금부터 눈 크게 뜨고 잘 보시라! 내 까치발의 위력을. 두둥!     


내 까치발이 이뤄낸 신비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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