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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유 Aug 10. 2024

일급은 난생처음이라

 2023년 5월 3일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 내가 번 돈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사준 날이었다.      



푸르른 5월이 이렇게나 더웠나.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란 일기예보를 들은 적은 있지만 대프리카 토박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5월의 더위쯤 우습다고 얕잡아 본 지난날을 후회한다.

호랑이 리오 쌤에게 살벌하게 pt를 받을 때도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던 땀방울이 빗방울이 되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아. 또 돈 날렸다. 러닝을 암만 뛰고 스쿼트 런지를 오징어 다리가 될 때까지 해봤자 원숭이처럼 얼굴만 빨개졌지. 땀이 이렇게 났던가. pt를 할 게 아니라 알바를 해야 했었다.

대체 남들 다한다는 똑똑한 소비는 언제쯤 실현 가능할까.




대형 선풍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고 내 머리도 선풍기를 따라 윙윙 어지럽게 돌고 돈다. 선풍기 소린지 내 소린지 아까부터 분간이 어렵고 귀가 먹먹하고 눈동자는 말라간다. 갈증을 풀어줄 오아시스가 간절하다. 인공 눈물과 시원한 아아 플리즈~!! 속으로 암만 외쳐봐도 고요 속의 외침이 이런 걸까. 박스 접고 원물 넣고 밴딩하고 송장 치고 적재하고 거기다 까치발 신공까지. 쳇바퀴 돌 듯 무한 반복이다. 몸은 녹아 흘러내리고 멘털은 탈탈 털린 지 오래다. 얘는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무슨 모터를 달았나. 지친 기색은커녕 손이 풀렸는지 오전보다 속도가 더 빨라졌다. 따라가자니 가파른 뒷산을 오를 때보다 더 숨이 차오르고 심박동 수가 정상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느덧 시계는 오후 세시를 가리켰다.


“잠깐 끊었다 갈게.”     


드디어 고대하던 오아시스를 만났다. 두 시간 일하면 십 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고 했다.

스무 시간은 일 한 거 같은데 국밥 파뤼 후 고작 두 시간 지났다니. 내 인생에서 이렇게 달콤한 십 분이 있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멈춰 버렸다. 뭔가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멍 때리기를 지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남은 오 분 동안 아무 생각 말고 멍을 때리리라. 나. 는. 아. 무. 생. 각. 이. 없. 다.로 시작한 마음의 소리가 물꼬를 튼 듯 여기저기서 마음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 에. 가. 고. 싶. 다 / 여. 기. 서. 뭐. 하. 니 / 50. 분. 만. 버. 티. 면. 퇴. 근. 이. 다


여러 개의 자아가 불쑥 튀어나와 날 도발했다가 위로했다가 난리블루스가 따로 없다.

후훗. 그렇지만 어림없지. 어떻게 오게 된 알바인데. 남은 50분 잘 버티고 꼭 6만 원을 벌어가리라.

눈 깜짝할 새 쉬는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난 4번 박스에 참외를 넣고 있다.

양손에 참외를 하나씩 들고 요리조리 살피다가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올해 초. 상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시댁은 곶감 농사를 짓는데 결혼 10년 차가 될 때까지 나는 일손을 보탠 적이 없었다.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 시 부모님이 힘들다고 못 하게 하셨다. 그게 아니라면 고추 모종 심을 때 한 번 도와 드린 적이 있는데 집에서 좀 떨어진 밭에서 불볕더위를 참다못해 어머님이 챙겨 오신 얼음물 세 병을 혼자 다 마신 탓에 아무도 물을 못 마신 적이 있었는데.. 여하튼 일부러 안 도와 드린 건 아니다.)

올해 처음 일손이 부족해서 가정용 지퍼백 포장을 몇 개 한 적이 있는데 그때 1킬로씩 포장하면서 아. 이런 알바 있으면 참 좋겠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내가 참외를 1킬로씩 담고 있을 줄이야.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긴 하지만 사랑스러운 친구 덕에 꿈을 이뤘다. 정. 말. 고. 마. 워. 칭. 구. 야.!!

띠동갑 남자 직원에게 부여받은 송장을 다 끝내고 오늘 둘이서 한 팔레트 반 정도를 채웠다.

대략 350개 정도 택배를 보내고 난 뒤 다사다난했던 알바 여정을 무사히 끝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침엔 버스 환승으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한번 해 봤다고 나름 여유도 생겼다. 어제 깔아 둔 버스 어플을 열어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시간에 맞춰서 정류장으로 향했다. 고개를 쭉 내밀어 멀리서 다가오는 빨간 버스를 확인하고 교통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직은 눈치 싸움에 약하다. 버스에 먼저 타기 위해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데 거기에 끼일 자신이 없어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다가 맨 마지막에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앉을자리가 있었고 앉자마자 가방에 들어 있던 시집을 꺼내려다 오늘은 좋아하는 시보다 차창 밖 구경을 택했다. 스쳐 가는 오월의 풍경을 한참 들여다보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꾸벅꾸벅 고개가 떨궈지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아. 천만다행이다! 아직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지 않았다. 버스에서 졸기도 하고 뭔가 갓생을 살아낸 기분이다! 오늘 하루 육아와는 조금 다른 성취감을 맛봤다.

다행히 아직은 어디서든 밥값은 하겠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안도감이 들었다. 뭐든 할 수 있겠다. 해보니 별거 아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좀 두렵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딸아이가 엄청 보고 싶어질 때 즈음 ‘띠리릭’ 문자 한 통이 왔다.      


-입금 60,000     


일급은 난생처음이라 어안이 벙벙. 8년 만에 내가 돈을 벌었다. 

과연 나의 피 땀 눈물이 깃든 6만 원을 아까워서 쓸 수 있을까. 버스를 기다리며 문자를 보고 또 보다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보면 러브레터 라도 읽는 줄 알았을 테다. 무사히 환승을 끝내고 익숙한 동네에 발을 내딛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아이 학원 차가 도착하기 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집안도 대충 치웠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이 마중을 나갔다. 기다리던 노란 차가 내 앞에 서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소중한 딸아이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달려온다.     


“엄마~~~~~”     


“루다야! 잘 다녀왔어? 너무너무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엄마 보고 싶었어. 엄마 나 젤리 먹고 싶은데 편의점 가면 안 돼?”     


“응! 가자! 엄마가 맛있는 거 다~~~~ 사줄게.”     


“좋아! 엄마 최고!”     


편의점에 들어가 젤리 코너 앞에 선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참 고민하던 아이는 지구 모양 젤리 하나를 골라 들었다.     


“엄마. 나 이거.”


“루다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른 것도 사.”


“아니 괜찮아. 나 이거 하나만 먹을래.”     


위풍당당! 오늘의 일급이 든 체크카드를 비장하게 내밀었다. ‘띠리릭’ 결제 문자가 울렸다.


2023년 5월 3일.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 내가 번 돈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사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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