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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유 Jul 13. 2024

안녕하세요. 하차입니다. 환승입니다.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과연 오늘 잠을 잘 수 있을까.

정신은 깨어있고 눈만 감고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조바심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결국 오던 잠도 달아나고 머릿속엔 온통 나에 대한 불신이 그득하다. 자비란 없는 나 자신 같으니.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에 나 자신 아님 누굴 믿겠냐만 지금은 당최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장 내일의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집도 어지러우면 못 배기는 내가 머릿속이 어지러운걸 배길소냐. 정말이지 오늘 잠은 다 잤다.

누군가는 하루 알바 가는 게 뭐 그리 대수냐 하겠지만 내겐 대수가 아니라 대대 대수다.

8년 만에 느껴보는 출근의 압박. 예전엔 압박이란 말이 딱 맞았는데 경력단절 아줌마에겐 이 압박도 특권처럼 느껴진다. 직장인들의 숨 막히는 특권.

직장인이건 알바생이건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내일이 마지막일 수 있겠으나 내겐 첫 출근이나 다름없다. 두.근.두.근 (나대지 마 내 심장아)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출근은 또 처음이다. 면접 없이 출근이라.

친구에게 들은 회사 정보는 과일을 취급하는 곳이며 대표님이 우리보다 어리고 남자 직원은 우리와 띠동갑이란 정도. 맙소사. 고용주가 나보다 어리다니 세월이 야속하다!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다가 꾸역꾸역 나이만 먹고 8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느낌이랄까. 말 그대로 올드걸이 된 기분이다. 겪어본 적 없는 일은 직접 눈으로 봐야 모든 게 실감 나는 법이다. 제발 날이 밝게 해 주세요!!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뭐라고? 벌써 날이 밝았다고? 난 이제 잠을 자 볼까 했는데? 별수 없이 감고 있던 눈을 부릅뜨고 기세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잠을 못 잔 탓일까.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핑 돌더니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혹시 나 어디 아픈 건가. 비틀거리며 겨우 거실로 나왔다.


지금 시각 am 6:30

웬일로 루다가 아직 자고 있지라고 생각하던 순간에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부스스한 머리와 퉁퉁 부은 얼굴이 매력적인 일곱 살 꼬맹이가 자연스레 내게 다가온다.

아 언제 맡아도 좋은 내 아이의 살냄새. 내 어깨에 사정없이 똬리를 틀었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밤새 스며든 아이의 침 냄새를 맡으며 서로 얼굴을 비비다 보니


어느덧 am 6:50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두 시간 남짓이다! 버스를 타려면 적어도 8:50분엔 집을 나서야 하니 어서 서둘러야 한다.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아이 손에 티브이 리모컨을 쥐어주고 급하게 욕실로 향한다. 긴장감 해소엔 콧노래만큼 좋은 건 없다. 언제든 작사 작곡이 가능한 콧노래를 맘껏 흥얼대며 샤워를 하고 닦토로 (명사-화장솜 따위에 묻혀 피부 표면을 닦아 내는 데 쓰는 화장수) 모닝 화장의 서막을 열어본다. 이게 얼마 만인가. 편안한 복장과 어울리게 오늘의 콘셉트는 내추럴 너로 정했다! 스피드 하게 화장을 끝내고 교복과도 같은 검정 트레이닝 셋업을 꺼내 입고 하얀 에코백에 텀블러와 앞치마를 챙겨 넣었다. 후불 교통카드도 한 번 더 확인하고 버벅대지 않고 잘 꺼낼 수 있게 에코백 안 작은 주머니에 따로 챙겨 넣었다. 드디어 출근 준비가 끝나고 아이의 등원 준비 스타트!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아침은 꼭 밥을 먹인다. 달걀 볶음밥을 휘리릭 만들어 예쁜 그릇에 담았다. 아이가 먹는 걸 지켜보면서 어제 미처 개지 못한 빨래 개기에 돌입한다. 아 어제 분명 다 해놓고 잤는데 정리할 게 왜 이렇게 많을까. 소리 없는 등원 전쟁의 끝이 보인다. 이제 남편 밥만 차려놓고 출근하면 된다. 어제 끓여놓은 국을 데우고 단출한 아침상을 차리고 남편을 깨웠다.      




여보 일어나. 나 곧 출근해야 해서. 루다 등원 준비 다 했고 여보 아침 차려놨어. 루다 유치원 차가 9시....      


밥 안 먹어 치워      


.........     


울컥 서운함이 치밀어 올랐다. 입술을 깨물고 식지도 않은 국과 밥을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설거지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현관 앞까지 따라온 아이는 난생처음 보는 엄마의 출근에 멀뚱히 쳐다보다 슬슬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아이가 울기 전에 급하게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자 괜스레 눈물이 났다. 도로 집으로 들어가 버릴까.

남편도 아이도 원치 않는 알바를 왜 한다고 했을까. 시작도 하기 전에 미안한 마음만 늘더니 몸도 마음도 개운치 않은 찝찝하고 울적한 8년 만의 출근길이 돼버렸다.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지고 노선을 한 번 더 확인했다. 3코스 가서 oo대학교에 내리고 길 건너 정류장에서 급행으로 환승. oo 역에서 하차.

드디어 내가 탈 버스가 보이고 교통카드를 꺼내 들었다.


삐-(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 목소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아. 너무 큰소리로 인사했나. 소심쓰- 눈 깜짝할 사이 벌써 첫 번째 정류장에 도착했다.      


삐-(하차입니다) 감사합니다.

탈 때 보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후훗 별거 아니구먼

길 건너 정류장에 서서 급행 버스를 기다린다. 저 멀리 빨간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삐-(환승입니다) 안녕하세요?

아까보다 더 작아진 목소리에 버스에 있던 그 누구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버스에선 이 데시벨로 인사를 해야겠구먼 (또 하나 배웠다)

자리에 앉고 보니 마치 큰 산을 넘은 듯 뿌듯함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사정없이 쿵쾅대던 심장 소리도 잦아들었다. 심신 안정을 위해 가방에 고이 넣어둔 내 최애 시집을 펼쳤다.      


돌아오는 길, 문밖으로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던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습니다 국수를 먹었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몇 분에게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주인집 어른께는 입맛이 없어 걸렀다고 답했다가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메밀국수-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中)-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에서 항상 눈물이 났다. 어쩜 끼니는 챙기거나 거르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창 밖 스치는 풍경이 끼니와 닮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고 그러다가 8년 만의 출근길을 이대로 울적하게 보낼 순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방 속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환승했어? 너 지금 oo 아파트 지났지?


응?? 뭐지? 그걸 어떻게 알아?


ㅋㅋㅋ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이번에 내려.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엉겁결에 친구의 말을 듣고 급하게 버스에서 내리니 정말 친구 차가 보였다.     


야! 타!!


구닥다리 수법이구먼!     


차에 올라타자 알바 말고 이대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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