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유 Jun 29. 2024

8년 만에 출근이란 걸 해보렵니다.

엄마는 진정 날 그렇게 키운 적 없다지만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이만 처먹은 걸까. 


어떤 일인데?     


과일 포장인데 어려운 건 없어.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 고급스런 과일 포장을 상상했다)

시급은 만원. 식대 지원되고 점심시간도 시급으로 쳐줘. 

나도 알바를 처음 해봐서 잘은 모르지만 요즘 세상에 이런 덴 잘 없을걸. 

요즘은 식대, 휴게시간 전부 제하고 일급을 주잖아. 내일도 사람 구한다던데 같이 해볼래?     


아... 내일은 안돼. (안될 일이 전혀 없는데 내 마음가짐이 안 돼먹은 거겠지)

루다랑 어디 가기로 했어. (내 딸 이름은 루다가 아니지만 내가 원래 원했던 이름으로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알바가 너무 해보고 싶지만 당장 해야겠단 생각은 없었다. (아니.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넘기고 뭔지 모를 조바심에 다시 친구에게 전활 걸었다.      


오늘도 일 갔다 왔어?     


갔다 왔지요. 오늘은 동네 언니랑 같이. 주위에 경력 단절 아줌마들이 좀 많냐.

내 주위에 꼭 일해야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 언니도 너무 오래 쉬어서 뭐든 경험해보고 싶다고 해서. 내일도 친구 한 명 데려올 수 있냐고 묻던데 넌 또 안 갈 거지? (내 맘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싶어 한 번 소름) 

그럼 이 언니랑 또 가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신 내 순서가 안 오겠단 생각에 두 번 소름)      


거기 회사가 어디라고 했지?? (친구도 나의 다급함을 눈치챈 듯했다)     


OO역 맞은편에 OO 초등학교가 있거든. 거기 바로 옆 골목.     


일단 노선을 찾아볼게. (언제 버스를 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시작하기도 전에 큰 난관에 봉착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택시 타고 갈게라는 오해 살만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오해라고 할 것도 없다. 이 친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게 돌+아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일단 네이버에 접속해 길 찾기 검색. 출발지와 도착지를 설정하고 대중교통 클릭!
어이쿠! 고난도의 환승을 해야 하구나. 우리 집은 외곽에 있어서 어디든 나가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기본 한 시간은 예상했지만 정말로 한 시간이라니! 절망스럽다. 시내버스를 한 시간 타 본 적이 있던가. 

엄마는 진정 날 그렇게 키운 적 없다지만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이만 처먹은 걸까. 환승은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첫사랑의 기억과는 조금 다른 두근거림이랄까. 아 정신 차리고 나름 계획형 인간으로서 버스 요금과 환승 방법을 검색해 보자. 기분 탓인지 요 며칠 새 내 미간은 점점 더 구겨지고 있다.

좀 있다 미간이라면 일가견 있는 친구에게 보톡스 잘하는 병원을 물어봐야겠다. 

의식의 흐름대로 괜스레 얼굴 스트레칭을 해본다. 정확한 방법은 몰라도 최대한 리프팅이 되도록 나의 눈과 이마를 힘껏 끌어올리며 중력을 거슬러 본다. 그러다 문득 마주한 허공에 왜인지 모르지만 내 인생 택시 발언의 시초가 떠올랐다.      




때는 중학교 입학식 날.

난생처음 보는 친구들과 섞여 4 분단 3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앞에 나가서 자기소개만 안 했지. 나의 첫인상이 판가름 나는 결전의 날. 

과연 내 중학교 생활이 평탄할지 말지 대충 어림짐작이 가능한 아주아주 중요한 그날.

담임 선생님의 간단한 소개 후 중학교 생활 전반에 대해 알려주시고 그것들이 모두 끝나 갈 무렵 등교 수단에 대한 설문 시간을 가졌다.      


자. 어떻게 등교하는지 해당하는 학생은 손을 들어주세요.     

1) 아빠 차 2) 버스 3) 자전거 4) 도보 5) 기타


아이들은 저마다 속하는 수단에 번쩍번쩍 손을 들었고 난 잠자코 있다가 마지막 기타에 손을 번쩍 들었다. 40명 중 오직 나뿐이었다.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된 그 순간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넌 뭐니?


네 저요??


아니. 뭐 어떻게 학교에 오냐고.


택시 타고 옵니다.


뭐?? 그 게 말이 되니? 중학생이 매일 택시를 타고 온다는 게 말이 돼?? 뒤로 나가!

네?? 뒤로요?     


입학식 날 뒤로 나간 애는 대한민국 통틀어 몇 명이나 있을까?

저 선생님. 나가라고 하셨으면 적어도 손을 들고 있어라. 아님 벽을 보고 있어라.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입학식에 오신 몇몇 학부모님들 사이에 끼여서 우두커니 서 있자니 다들 흘깃 쳐다보는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요. 제발 도와주세요!

난 오늘 택시를 타고 학교에 왔는데. 등교 수단이 정말 택시가 맞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금도 친한 친구는 그날을 떠올리며      


우리 엄마가 입학식 날 오셨잖아. 그때 너보고 쟤랑 놀지 마라고 하셨는데 호호호호

지금은 내 친구 중에 널 제일 좋아하시잖아! 호호호호 (진부한 위로 따윈 패스)  




그렇게 나의 중학교 생활의 첫 단추는 한참 잘못 끼워져 지울 수 없는 흑역사로 남았다. 

과연 나의 알바 생활의 첫 단추는 어떻게 끼워질까. 

버스 노선과 대략적인 이동 시간, 환승 방법까지 터득하고 나서야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일 갈게. 열 시까지 가면 되는 거지? 


응. 다 와 가면 연락해. 내가 정류장에 데리러 갈게!!      


그제야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보 나 내일 알바 갈까 하는데 


무슨 알바? 


아 친구가 알바 하는데 내일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루만 가볼까 하고. 

퇴근 시간도 조정해 준다고 해서 루다 오기 전에 집에 올 거야.     


예상대로 남편은 대꾸하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일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내가 알바를 알아볼  때도 아마 저러다 말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 매번 시작이 힘든 사람이기에. 

농부인 부모님 아래 2남 2녀 막내로 태어난 남편의 유년 시절은 바쁜 부모님의 부재로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 아이만큼은 항상 곁에 엄마가 있는 환경에서 키우고 싶단 말을 자주 했었다. 결혼 생활 십 년 차에 접어들도록 어떠한 상황에도 남편은 내게 부정적인 제스처를 취한 적이 없었다. 결혼 생활 처음으로 내 의견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무엇보다 한 시간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남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아는 남편이라면 내가 생활비를 부족하게 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했을지 모른다. 여태껏 생활비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난 지금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테스트해보고 싶은 거다. 다시 사회에 나가서 사람 구실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을 타파하고 싶다. 불안정한 어른 말고 스스로 성장하는 삶을 간절히 원한다. 남편이 키워주는 삶을 십 년 살았으면 이제 효도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남편의 반대에도 난 내일 한 시간 버스를 타고 8년 만에 출근이란 걸 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서른여덟 아줌마의 좌충우돌 알바 도전기의 서막이 올랐다.      

이전 04화 구인광고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