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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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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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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이었다. 

 내내 병 든 물고기처럼 무기력한 내가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하여 노력한 것은. 교무실에서 선생님의 다정한 부름을 받은 직후부터 나는 달라졌다.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친 척 인사를 했다. 국어시간에는, 마치 그 수업을 듣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선생님이 퇴근할 때쯤 복도나 주차장에서 인사를 했다. 가을 무렵에는 선생님과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됐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선생님이 먼저 알은체를 할 때도 있었다. 가끔 선생님 차를 얻어 타고 갈 수 있었던 건 내 노력 때문이었다. 

  "요즘 고민 있니? 늦게까지 혼자 학교에 남아 있네."

  선생님이 툭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민 없어요. 바라는 건 있지만요. 할머니가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으세요. 다행히 시력은 괜찮으시죠. 집에서 저는 항상 밝은 얼굴로 있어요. 할머니 걱정 끼쳐 드리기 싫거든요." 

 "이런 손주가 있으니, 할머니 든든하시겠다." 

 선생님은 운전대를 잡고 정면을 보며 좋은 말을 해 준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 마음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한다.  

 "오늘은 할머니를 위로해드려야 해요. 어젯밤에 아버지랑 할머니랑 조금 다투셨어요. 고장 난 시계, 인형, 작은 탁자, 오래된 국어사전 등 할머니는 버려진 것들을 주워 오세요. 엊그제 할머니가 하얀 국화를 주워 오셔서 꽃병에 꽂아둔 거예요. 아버지가 집안이 빈소냐며 내다버렸어요. 아버지는 할머니가 오래 사시길 바라실 거예요. 하지만 할머니는 불쌍한 꽃을 버렸다며 언짢아하셨어요. 두 분을 볼 때마다 저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선생님의 사적인 공간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등을 나름 구분하고 있었다. 사실 버려진 것을 줍는 것은 할머니의 감수성 취미가 아닌 직업이다. 하얀 국화는 사이다병에 꽂혔으며 그 사이다병도 할머니가 주워온 것인데 그 병만은 고물상에 넘기지 않고 은박호일을 감아 꽃병으로 사용한 것이다. 할머니는 하얀 국화 꽃병을 주방 앉은뱅이 책상에 두고 혹시라도 술 취한 아버지가 다치지 말라고 불을 켜 두었다. 아버지는 밤중에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이 노인네가 자기 죽으라고 고사 지내냐면서 사이다병을 방 벽에 냅다 집어던졌다. 잠들어 있던 할머니는 저승사자가 자기를 깨웠나 싶어 겁을 냈다가 술 취한 아들인 걸 알아채고 안심하며 밥은 먹었냐고 묻는다.

  "에휴, 이 멀쩡하고 불쌍한 꽃을 왜 버린다니." 

   그 와중에 할머니는 페트병의 허리를 잘라서 하얀 국화를 꽂아둔다. 그 재활용 꽃병을 내 방 책상 위에 두면서 인상을 쓴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별일 아니다. 어여 자라."    

  혹시 나도 저 하얀 국화처럼 할머니가 주워온 건 아닐까, 어릴 때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인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하지만 어른이 아직 덜 됐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서 분하고 쓸쓸하다. 어른이 되자마자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 구석을 탈출하겠다는 다짐만 할 뿐. 

  "언제부턴가 윤이보다 너하고 대화를 더 많이 하고 있어."   

   겨울방학을 앞두고 첫눈을 수태한 듯 잿빛으로 부푼 하늘 아래서 선생님이 말했다. 

  "윤이 누구에요?" 

  "우리 아들." 

  대시보드 위에 부착된 해바라기 모양의 액자 안에 바가지 머리를 한 소년이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아이가 윤이냐고 묻자 선생님은 그렇다고 말했다. 

  "열두 살 때지. 저때만 해도 표정이 많은 아이였는데. 우리 윤이, 너하고 동갑이야."  

  선생님은 승용차 안에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절대 친구하고 싶지 않은 인간. 그게 윤의 첫인상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둔 2월의 끝자락에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패밀리 레스토랑에 윤이 나와 있었다. 아름다운 어머니마저 민망하게 만드는 무심한 표정. 윤은 그런 얼굴로 나를 아주 잠깐 바라보았다. 윤의 기준에서 어머니가 소개한 동갑내기는 메뉴판에 적힌 음식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글재주가 좋고 매우 긍정적이며 따뜻한 감성을 가진 친구다. 그날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윤에게 이런 내용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했다. 식사 도중마다 나에 대한 말을 의도적으로 던졌다. 윤은 어떤 대꾸 없이 물만 마셨다. 나뿐만 아니라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은 내가 윤의 무엇이 되길 바란 걸까. 처음에는 친구가 되길 바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가족식사 자리에 껴주고 아파트에 초대한 것이다. 선생님의 15층 아파트는 매우 깔끔하고 쾌적했다. 클래식이 최소한의 가구가 놓인 집 안을 품위 있게 채우고 있었다. 베란다 창 너머로 내 세계가 보인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할까. 산 중턱에 있는 낡은 빌라와 다세대 주택이 희미하게 보였다. 여기가 내 세계라면 얼마나 좋을까. 소파에 앉아 샤인머스캣과 허브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같은 학교 다닐 때는 괜히 말 나올까봐 집에 초대 못했어. 이제 자주 놀러와. 우리 윤이가 숫기가 없어서 저러는 거야. 윤이 같은 애들이 친해지면 평생 친구 되는 거야."

  선생님이 샤인머스캣 한 알을 포크에 찍어주며 말했다. 윤은 내가 돌아갈 때까지도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주말이면 종종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그 집에서 식사를 했다. 나중에는 선생님이 없을 때도 윤을 만나러 갔다. 열대야 기간에는 거기서 지내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다. 어쩌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으면 아르바이트 중이라고 했다. 주말이면 갈빗집에서 숯불을 피워서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일에는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편의점에서 일했다. 생각 같은 건 할 틈이 없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그날 새벽에 나는 식당 뒷마당에서 숯불을 피우느라 바빴다. 그때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지금 윤이랑 같이 있니?"

 다급하고 불안한 목소리. 그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게 예의 같았다.

"아니요."

 하지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여름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 세계를 떠나왔으니까. 그런데도 한때 방문하던 그곳의 위치를 짐작하며 나는 담배 연기를 날렸다. 

  선생님은 겨울이 지나고 봄날이 된 후에야 나에게 윤의 부고를 알렸다. 아니 순서를 바로잡자면 윤의 생일부터 알렸다. 내일은 윤의 생일이다. 이번에도 나는 친구의 자격으로 선생님과 함께 윤을 기념할 줄 알았다. 

  

  사랑한다. 

  내일도 선생님은 윤의 사이버분향소에 글을 남길 것이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윤의 생일 전날 인터넷 분향소 카페에 들어가 본다. 윤의 고등학교 학생증 사진을 피해 선생님이 남긴 댓글을 본다. 선생님은 대답 없는 대상에게 사랑한다고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아들의 입장이 되어 대답할 수 있다면. 나는 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어떤 말을 남겨도 사진 속 윤이 나를 비웃을 것 같았다. 사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윤과 나 사이에.    

  버스가 목적지에 정차했다. 돌아가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아는데도 발걸음이 무겁다. 이왕 찾아가는 길, 따뜻한 봄바람에 몸을 맡기는 꽃처럼 가벼울 수는 없는 걸까. 마트에 들러 과일과 음료수를 산 후 편의점을 끼고 골목 안으로 천천히 걷는다. 올해도 저 집 담장 밖으로 목련나무 가지가 뻗어 있다. 하지만 꽃샘추위에 목련이 다 떨어진 건지 올해 봄에는 아예 세상에 나오지 않은 건지 흔적조차 없다. 

  선생님과 처음 이 길을 걸을 때는 담장 밖까지 하얀 목련이 탐스러웠다. 그날은 이사한 선생님의 집에서 차를 마시고 나온 참이었다. 나 혼자 가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선생님은 나를 정류장까지 배웅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교무실로 끌려가는 학생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선생님을 뒤따르고 있었다. 선생님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 작은 꽃잎은 생채기를 입었네. 살아 있으니까 이런 것도 생기는 거겠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부시게 하얀 목련이 찬란했다. 목련꽃이든 살구꽃이든 벚꽃이든 목숨꽃이든 나는 봄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선생님은 탐스런 꽃들 사이에서 상처 입은 꽃잎 하나를 용케 찾아내서는 저렇게 말한 것이다. 선생님의 가는 손가락이 담장 밖으로 나온 작은 꽃잎을 어루만졌다.  

  "오늘 윤한테 무슨 말을 했니." 

  선생님은 생채기 난 꽃잎에게 질문하는 듯했다.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나는 숙제를 안 한 학생처럼 떳떳하지 못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선생님은 목련꽃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너는 잘 지내야 한다." 

  그러고는 내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배웅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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