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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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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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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왜 나는 덥석 약속을 했을까. 

  사실, 돌아오는 봄마다 윤의 기념일을 챙기자고 말한 건 나다. 정확히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게 받아들일 만한 해독의 여지는 충분했다.

  "내년 윤의 생일에도 그 바다에 가실 거예요?"

  나는 덜컥 질문했다. 선생님이 내 등을 토닥이고 나서 그만 가보라는 말을 할 것만 같아서 저런 질문을 들이민 것이다. 선생님의 맑은 눈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먼저 말해줘서 고맙구나." 

  선생님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 말을 들으면 윤이 싫어하겠지만 윤은 선생님과 나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였다. 그런 윤이 없는 세상에서 선생님과 관계를 이어가려면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사실, 왜 내가 그런 약속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처음 봄바다를 다녀오는 길에 선생님은 이사한 집에서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말했다. 이사라고는 하지만 내 나이에 살던 집으로 옮긴 거라고 했다. 선생님댁은 주택가 골목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당에는 내 키높이의 나무가 작고 하얀 꽃을 가득 달고 있었다. 흰머리가 꽃처럼 보일 만큼 곱게 나이 든 어르신이 반겨주었다. 그 분이 바로 선생님의 어머니였다. 선생님이 나를 윤의 친구라고 소개하자 어르신은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사월의 오후, 나는 선생님의 제자가 아닌 윤의 친구로서 마당 테이블에서 차 대접을 받았다. 어르신은 나한테서 손주 윤의 일화를 듣고 싶은 눈치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어서 내가 윤의 미담을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우리 윤이 친구라고? 나를 외할미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얘기해."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본 나한테 뭐하러 이런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어르신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연극 배우처럼 어르신을 할머니라고 당장 부를 수는 있어도 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나 마시고 있었다. 

  "앵두꽃이 참 예쁘지. 아파트 정리하고 이 집으로 오길 잘했어. 여기는 내가 네 나이였을 때 이사온 집이야. 그때도 저 앵두나무가 있었단다. 이렇게 말하니 저 나무가 꼭 내 친구 같네."

  선생님은 손짓으로 작은 꽃들을 가리켰다. 앵두나무를 굳이 친구라고 한 것이 친구라는 말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내게 이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왜 내게 차를 마시자고 했으며 어르신의 기대를 그런 식으로 돌려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선생님댁에서 차 마시기는 자연스럽게 그 봄 외출의 마지막 코스가 되었다. 작년에는 셋이 가족인 양 저녁식사까지 한 후 살구차를 마셨다. 하지만 윤이 없는 윤의 방에는 내 마음 한 조각도 들어갈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 그 방은 죄인은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성역인 듯했다. 어르신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선생님이 불쑥 말했다.  

  "저 방을 윤의 방으로 꾸몄어. 작기는 해도 남향으로 창이 나서 겨울에도 햇빛이 잘 들어와. 독립하기 전까지 내가 쓰던 방이야. 그런데 이제 청소하러 들어가는 것도 조심스러워. 윤이한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친 사람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선생님이 가리킨 방문에서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영혼이라도 들어오라는 듯 대문이 열려 있었다. 꽃샘추위는 선생님 댁 마당에도 전염병처럼 퍼져 있었다. 앵두나무도 꽃을 피우지 않은 채였다. 붉은 봄꽃은 선생님의 양 볼에 핀 것 같았다. 선생님은 어깨에 긴 스웨터를 걸치고 현관으로 마중 나왔는데, 볼이 발그레했다.  

  “저 왔어요. 문은 꼭 잠가 놓으세요. 요즘 세상 위험해요.”   

  “대학교 2학년이라고 선생님을 가르치려고 드네. 얼른 들어와. 춥지?”

  "어르신은 어디 가셨나 봐요."

  집 안에는 어르신의 기척이 없었다.  

  “종교인이 되셨지. 교회에서 회개 기도하고 계실걸. 어제 새벽 내가 잠이 안 와서 와인을 먹고 있는데 가만 그 모습을 보시더니만 당신이 지은 죄가 크대. 그 탓에 자식이 혼자 봄밤에 술을 마신다는 거야. 그러더니 오늘 점심 드시고 교회에 가셨단다. 신한테 가서 죄를 용서 받으시겠대. 다른 사람한테 싫은 소리 한번 못 하고 살아온 양반인데.”

  식탁에는 레드와인 한 병과 와인이 반쯤 든 잔이 놓여 있었다. 그제야 나는 선생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든 이유가 술기운 때문인 걸 알았다. 

  선생님이 윤의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거실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신은 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그런 너스레를 떨어서는."

  방에서 나온 선생님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손에는 액자가 들려 있었다.  

  “신은 자기가 당한 일이 아니니까 쉽게 용서해 주는 거겠죠.”

  나는 초조한 듯 양손을 매만졌다. 

  “신에게도 사람을 용서할 자격이 있지. 아들이 사람 손에 죽었는걸.”

  선생님이 거실 테이블에 액자를 놓으며 말했다. 거기에 낯선 윤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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