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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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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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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의 벚나무 가지 끝에 매운 바람이 매달려 있다.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꽃샘추위 속에서 연둣빛 꽃눈이 부풀어 오른 상태로 잠들어 있다. 그래도 봄날은 봄날인지 허공의 뼈마디에는 햇빛이 달라붙어 반짝인다. 꽃샘추위에도 세 명의 아이들이 웃으며 공원 분수대를 뛰어다닌다. 아이들의 웃음이 싱그럽게 빛나는 오후, 구름 한 점 없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펼쳐져 있다. 그 어떤 얼룩도 묻지 않은 숫눈처럼 깨끗한 하늘이다.

  나는 방금 타야 할 버스를 떠나보냈다. 버스 꼬리가 저 언덕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버스 떠난 자리에 사월의 빛과 바람이 수상하게 몸을 섞는다. 내 마음은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공원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저기, 버스가 다가온다. 

  

  “내일 바다에 가지 않을래?” 

   그 전화는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사월에 처음 걸려왔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새벽 봄비처럼 쓸쓸하였다. 

   "친구도 오면 윤이가 덜 외로울 거야. 너희 나이에는 생일에 부모보다 친구가 와주길 바라잖니." 

  친구라고? 비웃는 윤의 얼굴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하지만 나는 싫은 마음인데도 어른에게 거절을 못하는 심약한 소년처럼 침묵만 보냈다.   

   "윤이한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어." 

   이어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침묵을 안쓰럽게 밀어냈다. 

   "윤이 사월에 태어났어요?"  

   잠시 후 선생님은 낮고 낮은 목소리로 윤의 부고를 들려주었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내 마음 가장 높은 곳에서 슬프게 반짝였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윤의 생일을 기념해서 분골이 가라앉은 그 바다에 가자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님과 처음 가 본 봄바다. 배는 연녹색 사다리 탑처럼 표시된 17번 부표 근처에 잠시 머물렀다. 분골함을 넣은 바구니가 저기쯤에 떠 있었지. 선생님이 가리킨 곳에는 하얀 국화 두 송이가 무기력하게 바다에 둥둥 누워 있었다. 분골함이 바구니에 담겨 떠다녔다던 17번 부표 근처로 나는 하얀 국화를 띄웠다. 

  그 후부터 작년까지 벚꽃이 피면 선생님과 그 바다에 다녀왔다. 올해는 꽃샘추위가 이어지면서 사월인데도 벚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들이 가지 끝마다 바람을 매단 채 수상하게 흐느끼고 있다. 사실, 오늘 봄 가장 수상한 건 내 마음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벚꽃의 개화를 선생님의 전화로 알았다. 선생님과 나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윤의 생일 즈음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만나기로 한다.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오면 시야 어딘가에는 벚꽃이 피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정오까지 선생님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내일 윤의 생일도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선생님은 나를 시험해보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윤의 생일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 결국 나는 오후 2시쯤 먼저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부를 물었더니 선생님은 댁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 다음 내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잘 지낸다고 대충 둘러댔다. 선생님은 그래, 라고 말문을 열었지만 그건 곧 통화를 끝내려는 신호 같았다. 

  "저,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제가 댁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나는 쫓기듯이 다급했다.  

  "그럼, 언제든 와. 꽃샘추위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환자의 미소처럼 안쓰럽게 빛났다.  

  이번 버스가 정차한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망설임을 끝냈다. 맨 뒷좌석에 앉아 선생님에게 전할 말을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자 머릿속에 하얀 캔버스가 들어찬 것 같았다. 도색만 바꾼 오래된 버스가 덜컹거리며 다음 정류장에서 급정거할 때는 캔버스가 짓이겨진 듯 어지러웠다. 혹시 잠을 못 잔 탓인가. 어둠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바뀔 때까지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에 허락없이 넘어오는 오토바이 공회전 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반가웠다.  

  오늘 나는 선생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른한 낮잠에서 황급히 빠져나오던 경험.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벚꽃이 피어난 어지러운 봄날, 중학생이었던 나는 국어시간에 졸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도 나는 우쭐해져서 나른함이 싹 달아났다. 선생님이 봄꽃처럼 신선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눈치 보듯이 어색하게 교무실로 들어갔다가 더 무안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선생님 옆에 서 있었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혹시 이 글이 경험을 쓴 거냐고,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게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번 수업시간에 봄날을 소재로 작문을 했을 때 나는 어머니를 눈 그것도 가장 완벽한 첫눈에 비유한 산문을 썼다. 교실 창밖을 보는데 벚꽃비가 내렸다. 연약한 벚꽃이 바람결을 따라 눈처럼 흩날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 모든 것을 용서할 것 같은 투명한 눈빛이었다. 내가 꿈속에선가 본 것도 같은 어머니의 초상이었다. 태어나서 나는 그 어떤 감각으로도 어머니를 느낀 적이 없다. 봄날의 착시현상일 수도 있는데, 그날 선생님에게서 완벽한 첫눈의 이미지가 느껴졌다. 나는 선생님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띄워 놓고 허구로 글을 썼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그 글은 중학교 3학년 소년이 국어시간에 봄날이라는 산문을 쓰면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내용이었다. 글 속에서 어머니는 소년이 열두 살 때 생을 마감했다. 벚꽃이 모가지를 떨어뜨리는 계절이었다. 그 모습을 첫눈의 낙하에 비유하며 앞으로도 나의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녹지 않는 깨끗한 눈처럼 기억될 거라고 마무리한 글이었다. 제목은 없었다.  

  “글 제목은 정했니?" 

  나는 말 못할 죄를 지은 소년범처럼 고개를 저었다. 

  "숫눈이어도 좋겠다. 숫눈은 눈이 와서 쌓인 그대로의 깨끗한 눈을 말하거든.”

  선생님의 손이 내 손을 감싸 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말해서는 안 되는 날 것의 감각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퍼져나갔다. 

  첫 눈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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