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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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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숫눈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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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은 나 보란 듯이 저 사진을 갖다 놓은 걸까. 사이버 분향소에서 본 윤의 사진이다. 벚꽃을 배경으로 하얀 반팔을 입고 있는 상반신 사진. 내가 아는 무표정한 그 얼굴. 

  "윤이는 머리가 큰 후부터는 사진 찍는 걸 싫어했어. 내가 같이 찍자고 해도 거부했지. 그런데 그해 봄 생일에는 윤이 왜 그랬을까. 윤아, 오늘 생일인데 엄마랑 나가서 밥도 먹고 벚꽃도 볼까. 거절할 거라고 예상하고 닫힌 방문 앞에서 말했는데 윤이 문을 열고 나온 거야. 우리는 벚꽃을 보며 같이 밥을 먹고 산책도 했어. 꿈만 같았어. 윤아, 벚꽃 앞에 서 봐. 엄마가 사진 찍어줄게. 윤이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아들처럼 꽃 앞에 섰어. 그때 우리 애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봄날, 윤은 어머니의 손에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의도한 것인지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선생님도 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주방으로 가더니 나한테 배는 안 고프냐고 물었다. 내 안의 허기를 바로 채워줄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저도 와인 한 잔 주세요." 

  "낮술 괜찮겠어?" 

  "그럼요.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닌데요." 

   나는 윤의 사진을 등지고 식탁 의자에 앉는다. 태어날 때 윤과 나의 자리가 바뀌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아는 윤은 가진 것의 가치를 모르거나 모르는 척했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에 시달리는 에리시크톤처럼 어디에 있어도 결핍만 느낄 거라면 알콜중독 아버지와 반지하에 가까운 지층 집에서 살아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통해 윤의 부음을 들었어도 윤이 왜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것처럼. 다만, 선생님은 함께 처음 간 봄바다에서 윤이 해독하기 어려운 그림을 남겼다고 했을 뿐이다. 그게 뭘까,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독하게 떼 쓰는 아이처럼 내 정신의 일부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순수하게 궁금하다. 

  윤의 마음에는 어떤 풍경이 있었을까.

  선생님이 내 앞의 잔에 적포도주를 따라준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안 물어보세요?"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보는 사이니."

  우리는 봄날에 한 번 윤의 생일 즈음 바다에 가는 사이 아닌가요. 나는 속말을 삼키며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느껴진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왜 저한테 전화하셨는지 궁금해요. 윤이 만났느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선생님 목소리가 다급했어요."

  나는 열일 곱 살 겨울에 걸려온 전화를 어젯밤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 하얗게 눈이 왔어. 윤은 친구 만나러 간다면서 나갔단다. 그 말이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 이제 내 아이도 건강한 교류를 하며 살겠구나. 그래, 새파랗게 젊은 애가 혼자 방에 갇혀서 살 수 없지. 그 친구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어. 윤이의 눈치를 살피면서 용돈을 줬어. 윤이는 그 돈을 주머니에 넣고 예의 바르게 고개까지 숙였어. 베란다에서 윤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단다. 그런데 자정이 넘어도 윤이 안 온 거야. 윤이의 방문을 열었더니 그 그림이 있지 않겠니. 내 눈에는 그게 우리 윤이가 남긴 그림처럼 보였어. 불길했어. 윤이는 휴대폰을 방치했거든. 그런데 그날은 휴대폰을 챙겨갔어.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어. 응답할 수 없는 지역에 있다고 음성이 나오는 거야. 바로 너한테 전화를 한 거야. 내가 아는 한 윤이가 최근에 만난 동갑내기가 너였으니까."

  최근이라고는 하나 나는 그해 여름 이후에 윤을 만나지 않았다. 일상을 말하듯 선생님의 말조는 차분했다. 선생님이 혹시 내일 일정을 언급할까 싶어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와인을 한 모금 먹은 후에도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내일이 윤의 생일이라는 건 누구보다 선생님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같이 그 바다에 가자고 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 선생님과 봄바다에 다녀온 후 한동안 죽음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귀가 먹은 할머니는 죽음을 이고 다니느라 등이 굽은 듯 보였다. 한번은 할머니와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밥맛 떨어져. 어차피 죽을 건데 뭐하러 귀찮게 밥을 먹냔 말이야."

  할머니는 이가 다 빠진 입안에서 웃음을 밥알처럼 오물오물 굴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고 주름진 손이 내 손을 와락 잡았다. 

  "죽으려면 우선 살아야지." 

  발음이 다 뭉개진 할머니의 말을 우울할 정도로 나는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더 기겁할 만한 사실은 귀가 안 들리는 할머니가 내 말을 기막히게 알아듣고 대꾸했다는 점이다. 나는 집 밖, 그러니까 빛 속으로 뛰쳐나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 떠날 날이 사적으로 은밀하게 고지라도 되는 걸까. 할머니는 작년 봄의 입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귀 먹은 할머니는 긴박한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듣지 못했다. 폐지가 담긴 수레를 끌고 다른 날처럼 도로를 건너다 구정을 앞둔 새벽 승용차에 치였다. 다리뼈가 부러져서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담당 의사의 소견과 다르게 할머니는 퇴원 후 숙제를 끝낸 아이처럼 후련한 표정으로 떠났다. 할머니가 주는 대학 입학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방이나 구해라. 아버지는 운전자 보험회사에서 나온 돈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 돈으로 대학가 4층 원룸의 월세 보증금을 해결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독립할 수 있었다. 그해 봄바다에 선생님과 동행하면서도 나는 이런 근황을 전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안부를 물으면 기계적으로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윤을 기억하는 자리에 살아있는 나 같은 건, 그저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 게 예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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