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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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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B01호의 시간

04

 04

 

  너는 잘 지내라. 

  친구의 마지막 목소리가 점멸하는 가로등처럼 소년의 머릿속에서 안타깝게 깜빡거린다. 소년은 자기를 일으켜 세운 사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친구가 아니라는 거였다. 소년은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내내 사내가 침묵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눈을 감고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중이라고 억지로라도 우길 수 있어서. 

  한편으로 소년은 사내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소주 냄새와 함께 사내의 손이 어깨로 다가왔을 때 소년은 세 번째 남자한테 선택 당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남자는 사우나에서 만났다. 첫 번째 남자는 소년처럼 미래가 불투명했고 젊었다.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소년은 말없이 체온을 나누는 그 시간이 좋았다. 친구라고 상상하면 슬플 정도로 흥분이 됐다. 그가 얼굴을 똑바로 보고 애무하고 싶다는 필담을 건넨 후 소년은 남자를 떠났다. 술에 취해 자신을 전직 특수정보부사관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소년의 두 번째 남자였다. 그는 소년을 대형마트 보안요원으로 배정한 보안업체 팀장이었다. 소년은 그가 다부지고 멋진 체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도 나 같은 인간이면 좋겠어.  

 185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근육질의 체구를 가진 남자는 교육이 끝나는 날 당돌한 사춘기 소년처럼 고백했다. 소년은 6개월 이상 근속 조건으로 마트에서 하루에 11시간 보안요원으로 일했다. 팀장은 소년을 기다렸고, 소년이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사 주었고, 소년에게 너는 나의 처음이라고 말해주었다. 스무 살의 소년은 생각했다. 스무 살의 내 친구라면 어땠을까. 

  잠이 안 온다. 매일 밤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남자가 전화로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소년은 바로 그 의견에 따랐다. 친구 때문이었다. 

  잠이 안 와. 

  지나간 여름,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소년은 자도록 노력해보라는 빤한 말을 했다. 

  어제보다 더 잠이 안 와. 

  소년은 따듯한 물을 마셔보라고 했다. 이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여름밤, 친구는 헛웃음을 내보내며 전화로 말했다.  

  두 번째 남자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보면 표정이 일그러졌다. 밖에서 강한 사람과 갈등을 겪고 온 날 남자는 거울을 깼고 의자를 던졌고 소년에게 윽박질렀다. 소년이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남자는 평온을 되찾았다. 소년을 때린 적은 없었다. 다시 여름이 왔다. 하나뿐인 친구가 불면에 시달렸던 계절. 소년은 남자의 집을 나가야겠다고 결정했다. 분노 조절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짐을 실행하기로 한 날 소년은 술을 마시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먹색 구름이 무겁게 깔린 하늘 아래서 소년은 퇴근하는 남자를 기다렸다.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고, 저만치서 걸어오는 남자는 우산을 쓰고 있었다. 

  꼴이 그게 뭐야. 

  남자는 소년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교복과 가방을 훑어보았다. 소년은 자신이 버려질 장소를 물색해놓았다. 남자는 길들여진 짐승처럼 소년의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인적 없는 재개발 구역에서 소년은 준비한 말을 남자의 면전에 내뱉었다. 

  나는 강한 사람한테 끌린다. 너는 약하다. 나는 네가 싫다. 

  남자는 바로 우산을 내던졌다. 바로 소년의 얼굴에 남자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남자가 질책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주먹을 내려 보려는 순간 소년은 힘주어 말했다. 

  네가 싫다. 너는 만만하고 약하다. 

  다시 남자의 주먹이 날아왔다. 시원한 한 방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지나간 여름 친구의 암호를 해독해내지 못한 자신은 맞아 마땅한 인간이었다. 남자는 공처럼 웅크린 소년의 몸에 가차 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던 소년이 바닥에 무기력하게 뻗어버린 후에야 남자는 발길질을 멈추었다. 혹시 남자가 자신을 응급실이나 방으로 데려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남자는 등을 보인 채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소년은 그대로 뻗어 있었다. 빗물이 상처 난 얼굴을 긁어댈 수 있도록. 그러니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낯선 사내의 부축을 받고 하룻밤을 보내도 상관없는 거였다.  

  아드님이 많이 다쳤네. 

  기사는 사내와 소년 사이를 단정한다. 비로소 소년의 시선이 바로 옆 사내에게 향한다. 사내는 기사의 말에 대꾸 없이 아버지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 사실, 소년은 아버지다운 미소가 무엇인지 모른다. 혹시 닳고 닳은 농담처럼 시시했던 그 상상이 현실이 된 건 아닐까. 우연히 대중교통 안이나 거리에서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나는 상상. 소년은 택시 문을 부여잡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게 웃음을 일그러뜨린다.  

  육아원에서 처음 원장에게 엉덩이를 내보인 날 소년은 상상했다. 어딘가에 있는 아버지가 언젠가 원장에게서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거짓말 한 소녀들은 잘못이 없었다. 소년들 무리에 끼지 못하고 혼자였던 소년에게 손을 내밀어주었으니. 어느 날 소년은 소녀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 소녀가 손을 내밀었고, 혼자 있는 것에 싫증난 소년은 그 손이 이끄는 세계로 들어갔다. 육아원 소녀들은 하얗고 체구가 작은 소년을 인형처럼 갖고 놀았다. 소년을 꾸며놓고는 자기들끼리 웃었다. 하얀 도화지 같은 소년의 시간은 소녀들의 웃음과 손길로 채워져 갔다. 소년은 소녀들이 건네 준 치마를 입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라도 소녀들과 어울리는 편이 더 나았다. 갑자기 뒤뜰에 나타난 원장에게 발각된 날, 설명도 없이 그 놀이는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원장 앞에서 가장 나이 많은 소녀는 거짓말을 했다. 저희들끼리 놀고 있는데 소년이 와서 머리핀과 치마를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돌멩이를 들고 협박을 했다고도 했는데 소년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일렬로 선 소녀들이 약속한 듯 눈물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소년은 볕이 잘 드는 원장의 집무실에 남아 처벌을 받아야 했다. 원장은 커튼을 내린 후 소년의 엉덩이를 허리띠로 착 내리쳤다. 후에 소년은 여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방에서 주기적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원장은 때린 후 너를 바로잡기 위해서야,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원장이 모든 아이들에게 꼬투리를 잡아 폭력을 휘두른 건 아니었다. 소년이 보기에는 자신에게만 그랬다. 중학생이 된 소년은 더 이상 원장에게 맞지 않았다. 어느 날 나른한 바람 한 줄기 불었을 뿐인데 소년의 눈앞에서 뭉텅, 붉은 동백꽃 모가지 하나가 떨어졌다.     

  왜 나한테만 그랬을까. 

  소년은 막 투신한 꽃을 보며 늦은 속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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