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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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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B01호의 시간

03

 03

  


  자정이 지난 열차 마지막 칸에는 사내와 소년만 남았다. 사내가 목적지를 지나쳤기에 펼쳐진 장면. 열차 문이 닫히기 전 사내는 열린 문 앞에서 소년을 흘낏 바라보았다. 소년이 바로 옆에 있었다. 의자에 옆으로 엎드려 있어 얼굴도 안 보이는 소년. 사내가 그 옆에 앉았을 때 열차 문이 닫혔고 그렇게 마지막 순환선 열차 마지막 칸에 둘이 남게 되었던 것.       

  사내는 자신의 무릎으로 소년의 머리를 받쳐 주고 싶다. 고개를 숙이고 다정히 어디 있다가 왔냐고 물어보고 싶다. 마치 자신이 소년의 뭐라도 되는 양. 소년의 촉촉한 머리카락과 앳된 목덜미에서 비처럼 서늘한 내음이 날 것만 같았다. 의자에 상체를 쓰러뜨린 소년에게 사내의 마음이 가닿는다. 사내는 주머니에 든 담뱃갑을 다시 세게 움켜쥐었다. 모르는 소년이 자꾸 불러오는 무엇이 빗줄기처럼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사내의 굳고 낡은 마음으로.  

  얘야, 이런 데서 잠들면 감기 걸린다. 나도 집에 너 만한 아들이 있는데. 

  내뱉지 못할 속엣말. 헛웃음이 사내의 목울대 근처에서 맴돌았다. 사내에게 소년만 한 아들이 있는 건 사실이나 그 아들이 사내의 집에 있는 건 아니었다. 사내는 아들이 소년보다 두 살은 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소년의 교복 등에 진흙 자국이 있다. 빗길에 미끄러져서 생긴 걸까. 설마 발길질이라도 당한 걸까. 사내의 속엣말이 이어지는 건 모르는 소년이 알 수도 있는 사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들도 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사내는 진입로 바로 옆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같은 교복을 입어 엇비슷한 학생 무리 속에서 아들을 못 알아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가까이에서 아들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스쳐지나갔다. 하마터면 사내는 클랙슨을 울리고 창문을 내려서 아들에게 타라고 말할 뻔했다. 수험생 아들을 차에 태워서 동해바다로 나가 회와 술을 사 주는 그런 아버지. 누군가에게는 손쉬운 일이 사내의 인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내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사이 아들이 흘낏 사내 쪽을 본 것도 같았다. 생각에 빠진 듯 천천히 걷던 아들이 보폭을 크게 하더니 사내의 시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게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후 아내는 아들의 학교 앞에 찾아가지 말라고 전화로 통보했다. 

  결정을 해야 할 때다. 사내는 다짐한 후 소년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마지막 순환선을 탄 소년에게 갈 곳은 없어 보였다. 열차 문이 열렸다. 사내는 말없이 소년을 부축했다. 소년의 터진 입술과 얼굴 여기저기 긁힌 자국을 보고 있자니 그런 무모함이 생겼다. 소년은 무기력하게 제 몸을 사내의 손에 맡겼다. 사실 사내가 아들을 찾아가지 않은 건 아내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시선 밖으로 도망치던 아들의 다급한 발걸음. 사내는 그걸 지켜보는 것도 따라가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소년의 입가에서 나른한 술 냄새가 났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오자 지상에는 축축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지하철 입구 앞에서 소년은 가느다란 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빗줄기는 여전히 도로를 적시고 있다. 사내는 소년의 어깨를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소년은 사내가 어깨에 두른 팔을 빼지 않는다. 저 공중에서 병원의 녹색 십자가 간판이 불을 밝히고 있다. 사내는 한 손으로 우산을 펴 들었다. 


  싫어요. 

  소년이 처음으로 사내에게 한 말이었다. 택시를 잡아탄 후 사내가 인근 병원으로 가 달라고 하자마자 소년은 저 말을 툭 내뱉었다. 그제야 사내는 자신의 행동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을 응급실에 데려가는 건 자기 권한 밖의 행위였다. 결국 사내는 거주하는 동네의 역 이름을 말하며 그 근처로 가 달라고 했다. 소년이 아무 말 없이 차창 밖에 시선을 주었다. 사내는 아주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소년에게 거부당할 수 있었다. 사내는 거부당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특히 문 밖에 세워지는 그 느낌이란. 

  요즘 애들은 애들이 아니에요. 애들 싸움이 아니라 조폭 싸움이라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택시기사는 몇 번 룸미러로 사내와 소년을 보더니 말했다. 사내는 대답 대신 넌지시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은 말없이 창 너머의 거리를 본다.  

  사내의 손이 닿았을 때 소년은 놀라지 않았다. 바람이, 햇빛이, 빗줄기가 그저 몸을 툭 건드린 듯 가만히 있었다. 소주를 마셨고, 일방적으로 맞았고, 혼자가 되었다. 체온이 필요한 시간이다. 처음으로 소년에게 체온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바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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