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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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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B01호의 시간

02

 


  02

  

  사내는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담뱃갑을 움켜쥐었다. 담배 생각이 났다. 다음 칸에 내려서 딱 담배 한 개비만 피우고 싶었다. 그러면 잠에 빠진 듯 일어나지 않는 저 소년을 놓쳐버릴 것이었다. 사내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한낮 현장에서 일용직 인부들은 장마가 시작되니 공치는 날이 질기게 이어질 거라고 담배 연기 사이로 엇비슷한 행색만큼이나 닮은 말들을 내뱉었다. 사내는 남 일이라는 듯 그들과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담배 연기를 날렸고 어떤 이가 대학생 아들 공무원 학원비를 운운하며 사내에게 그만한 자식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왔을 때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대학생 아들은 없습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사내가 처음으로 길게 내뱉은 말이었다. 일을 끝낸 저녁 돌아오는 길에 사내는 근린공원 벤치에서 혼자 천천히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공원 벤치에는 모두 쇠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치 술이 약한 사내가 혼자 소주를 마시다가 누울까봐 이를 막으려는 듯이. 술이 오른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벤치에 앉은 채로 밤까지 잠들었다. 깨운 것은 사내 입장에서 갑자기 쏟아진 비. 이 지역의 강수 확률 50% 라는 예보를 보고 우산을 준비한 사람들, 흐린 하늘만 보고 우산을 준비한 사람들, 비가 쏟아지자 우산을 구입한 사람들 그러니까 비를 그저 비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 사내는 속하지 못했다. 후두둑, 비의 발길질에 눈을 뜨며 사내가 한 생각은 비마저도 왜 자기를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 주변의 모든 것들, 이 비마저도 자기를 버린 공모에 가담한 것 같았다는 것. 그러니 자신은 혼자 내처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사내는 비틀거리며 편의점에서 아무 우산이나 잡히는 대로 샀다. 빗줄기가 우산 위를 톡톡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검은 우산을 산 것을 알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술기운으로 어지러운 와중에 미약하게나마 이로운 생각을 했다. 혼자가 됐지만 이제 와서 뭐 어쩌란 것인가 하는 것. 

  지금 사내의 시선은 소년에게 머물러 있다. 

  사내는 그런 자신이 낯설고 겸연쩍으면서도 술기운 탓으로 돌리며 눈을 떼지 않는다.          

  사내가 모르는 소년의 버릇 하나. 여름밤 순환선 타기. 재작년 여름의 끝에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생긴 버릇이다. 그 시기에 소년은 보호시설에서 나왔다. 그 후부터였다. 혼자 네모난 방에 누워 있으면 어둠의 손아귀가 목을 그러쥘 것만 같았다. 밤이면 형광등이 떨어지거나 천장이 무너져버릴까 봐, 식은땀이 났다. 어둠의 눈동자와 마주칠까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전등을 켜 놓고 잠드는 버릇이 생겼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 중 어느 하루는 방이 심해에서 고장 난 잠수정처럼 느껴졌다. 그곳이 실제로 잠수정이든 방이든 중요한 건 혼자 있다는 사실. 

  이렇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는데. 

  여름 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한껏 웅크린 동작으로 소년이 한 생각. 그리고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 죽는 꿈이기도 했다. 좁고 주름진 구멍을 찢고 막 세상에 나왔을 때 커다란 천이 온몸을 덮었다. 천 밖에서 손 두 개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죽었다고 느낀 순간 소년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날 밤 소년은 방을 뛰쳐나와 순환선에 몸을 실었다. 한 명이라도 있는 곳에서 잠들고 싶었다. 소주 반병이라도 마신 밤에는 돌고 도는 순환선이 고향처럼 느껴졌고 기다란 육면체 공간 안에서 뼈와 피를 나눈 이를 만날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고향이 어디인지 형제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소년에게 고향은 무슨 일을 당해도 두렵지 않은 곳. 죽음마저도.  

  열차가 정지하려는 순간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성큼 다가와 갑자기 칼로 푹 찌르고 달아나는 상상. 모르는 이들의 휴대폰에 실시간으로 담기는 죽음. 나쁘지 않은 엔딩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칼침을 놓는 사람이 생물학적 아버지라면 더 괜찮은 엔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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