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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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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B01호의 시간

05

 05


  B01.

 소년은 문에 붙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연립 건물의 반 지하 첫 번째 방에 살았다. 네모난 우주라고 부르던 그 방이 문득 떠올라서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 방을 찾아낸 것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버려진 장소를 잘 찾아냈다. 귀소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씁쓸해졌다. 원장은 소년에게 매질을 가하며 길바닥에 버려진 아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폐기물 같은 아이.

  여기 마음에 든다. 

  친구는 폐쇄된 종합병원 병동 창가에 서서 말했다. 친구가 날린 담배 연기는 향처럼 느리게 어스름을 부유했다. 친구의 혼잣말을 주워 듣고 소년이 찾아낸 장소였다. 친구는 사람들 없는 데서 담배 피우고 싶다고 작게 말했다. 소년은 버려진 것들의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방법을 알았다. 

  그 방은 공사가 중단된 언덕 재개발 구역에 있었다. 빌라는 반쯤 헐려서 앙상한 뼈를 드러냈다. 계단을 내려가니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철문에 아직 호수가 붙어 있었다. B01호. 칠이 벗겨져서 0만 온전했지만 방 호수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커튼이 드리워진 반 지하 방은 온전했다. 비교적 깨끗했고 가구는 침대만 있었다.       

  여기 꼭 신성한 폐허 같지 않냐? 아무나 못 오는 곳. 

  친구가 그렇다고 말하니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그 방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비로소 소년은 기뻤다. 친구에게 이 장소를 안내하기 위하여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숨을 곳을 찾아낸 묵시록의 생존자처럼. 

  하얀 달빛이 공중에 걸려 있던 밤이었다. 소년은 그 방에서 친구에게 어릴 때 이야기를 했다. 원장에게 불려가 엉덩이를 맞았던 이야기를 별일 아닌 것처럼. 어둠 속에서 친구가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 순간 불빛이 들어온 듯 소년의 마음이 환해졌다. 친구는 뒤에서 소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지붕처럼 소년의 마른 몸을 덮어 주었다. 친구는 어둠 속에서 소년의 엉덩이에 생긴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다. 

  친구가 단단하고 따뜻하게 소년의 몸 안으로 처음 들어온 시간. 타인의 체온이 느껴지던 그때를 소년은 0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마침내 그 방에서 소년은 탯줄이 달린 태아처럼 선험적인 소속감을 느꼈다. 분리되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계속 친구와 0의 시간을 가졌다. 

  소년은 고교시절 거의 모든 과목에서 낮은 등급을 기록했고, 그중 수학은 최하위 등급을 받았다. 허수, 실수, 절대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0은 자웅동체의 세포, 모든 감정의 원자들을 품은 우주처럼 보였다.    

  그 후로 소년과 친구는 서로에게 서로의 체온을 불어넣어주었다. 가끔 밤늦게 친구를 만난 후 소년은 담을 넘어 육아원에 들어가야 했다. 원장에게 들킨 날에는 체벌을 받았다. 늙어가는 원장이지만 폭력을 휘두를 때만큼은 혈기왕성해졌다. 어릴 때처럼 엉덩이를 보여야했다면 원장의 손목을 잡았을 일. 고등학생으로 자란 소년은 반항하지 않았다. 친구가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시간이 다음 페이지처럼 펼쳐질 테니. 친구는 그 상처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입맞춤하고 따스하게 만져주었다. 

  언제든 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친구가 상처를 본 후 한 말이었다. 소년은 믿었다. 네모난 우주, 둘 만의 아지트를 엿볼 사람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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