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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혼잣말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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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 Jan 09. 2023

B01호의 시간

06


 06

  


  원룸에 들어온 후 사내는 플라스틱 서랍장 위에 있는 가족사진을 엎어놓았다. 사내와 소년은 택시에서 내려 반 지하 원룸으로 들어오는 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다. 빗소리와 화장실 샤워소리가 8평 원룸 안에서 몸을 섞는 가운데, 소년은 구석에 앉아 있다. 잠시 후 사내가 상체를 탈의하고 나왔다. 파릇파릇한 시간이 빠져나간 사내의 몸은 두 번째 남자와 비교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탄력이 없다. 사내가 다가와 소년에게 수건을 건넨다. 사내의 입가에서 담배 향이 났다. 공사가 중단된 재개발 구역의 B01호에서 여름 빗소리를 들으며 키스했을 때 친구의 입 안에는 담배 향이 가득했다. 사내에게서 친구의 담배 향을 떠올린 건 여름 빗소리 때문이라고 소년은 생각한다. 

  좁고 습한 화장실에는 담배 냄새가 배어 있다. 소년은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오른쪽 눈은 부어 있다. 치아는 멀쩡한 편이지만 입술이 터져서 입을 조금만 벌려도 욱신거렸다. 옆구리를 누르면 통증이 느껴지지만 소년이 판단하기에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은 거울에 이마를 가만히 기댄다. 

  너는 잘 지내라.  

  친구가 이렇게 말했을 때 왜 가만히 있었지. 소년은 자기자신을 취조한다. 대답 대신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울린다. 자신이 지구의 변두리 반 지하 화장실에서 보내는 전파를 친구가 수신한다고, 믿고 싶다. 오늘처럼 술기운이 퍼져 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한 번만 듣고 싶다. 신호는 살아 있다. 왜 친구의 휴대폰은 정지되지 않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소년은 혼잣말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로 안녕, 이라고 속삭인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다. 화장실의 습기와 채 빠지지 않은 담배 향, 저 너머에서 울리는 빗소리가 소년의 주변을 서성거린다. 소년은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옷을 벗는다. 곧 소년의 마른 몸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전화 목소리도 못 듣는 사이가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대화를 하지 말걸. 소년은 샤워기를 틀어놓고 그 아래 웅크려 앉는다. 학교 건물 뒤편에 버려진 돌처럼 가만히 웅크려 있던 그때처럼. 

  인적이 드문 학교 후미진 곳을 찾아내는 건 소년의 특기였다. 소년이 기대어 앉은 담벼락 앞에 같은 반 애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았다. 처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붉은 손가락 같은 꽃이 피어 있었다. 

  “꽃은 참 솔직하지 않냐? 암술하고 수술을 다 드러내잖아. 사람으로 치자면 성기인데.” 

  소년이 같은 반 애를 바라본 것은 낯설어서였다. 자신은 따돌림도 못 받을 정도로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꽃 이름을 말하며 소년에게 갑자기 말을 걸어 온 건. 같은 반 애의 시선이 꽃에게서 소년으로 옮겨갔다. 소년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같은 반 애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선운사에 같이 갈래?”

  태어나서 처음 들은 말. 소년은 이름만 아는 같은 반 애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성적이나 많은 것이 우수한 애가 자신을 상대로 사회 실험을 하는 듯했다. 무슨 실험인지는 알 수 없었고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 꽃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어제도 여기 있었잖아. 이때쯤 선운사에 꽃무릇이 한창이거든. 어렸을 적에 부모님하고 선운사에 간 적 있어. 8월 말이었는데 꽃무릇이 가득 피어 있었어.” 

  그제야 소년은 눈앞에 핀 붉은 꽃을 바라보았다. 잎도 없이 이런 데에 달랑 피어 있는 꽃.  

  “안 좋아해.”

  “아, 미안. 나 혼자 멋대로 생각했네. 꽃무릇은 평생 꽃하고 잎이 만나지 못해.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 잎이 말라 죽은 다음에 꽃이 피거든. 다른 식물들은 꽃과 잎이 함께 피잖아.” 

  붉은 꽃의 특징 같은 건 소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 꽃 이름을 알려줬지. 그때는 말이야. 장난감 칼로 아버지 허리를 찌르기도 했는데, 이제는 못 그러겠어. 왜 그럴까.”

  소년이 그만 자리를 뜨려는데 그 애가 물었다.  

  “우리는 아이가 아니니까.”

  소년은 부끄러워서 얼른 자리를 떴다. 그 애와 자신을 묶어 ‘우리’ 라고 한 건 왠지 말실수를 한 느낌인데다가 ‘아이가 아니라는’ 말은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어수룩한 답변 같았다. 비록 선운사에 가지는 못했지만 가을에 둘은 함께 걷고 있었다. 지금도 소년은 친구가 왜 자기한테 말을 걸었는지,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소년의 눈에 비친 친구는 완벽한 어른이었다. 친구는 우수함을 드러내지 않았고 약하고 만만한 것들에게 부드럽게 대했다. 소년은 그 무엇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이 먹이사슬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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