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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난 이작가 Nov 15. 2022

형, 이제 오지 마

10. 형, 이제 오지 마

바로 도근행 들어온다.      


도근행    형.      


서류 정리하던 고진옹, 움찔하나 고개 들지 않는다. 

도근행, 고진옹에게 바짝 다가가 앉는다.      


고진옹    구조조정 대상이야. 

도근행    미쳤어? 형, 왜 이래?

고진옹    20% 감축으로 합의가 이루어져서 12,000명이 대상자야. 

도근행    그거 막자고 고공농성 했잖아. 

고진옹    사측이 널 찍었어. 나도 어쩔 수 없다.     

 

고진옹, 잠시 망설인다. 

고진옹, 사무적 태도로 서류와 펜을 내민다.  

    

고진옹    여기에 사인하면 권고사직으로 퇴사 월까지 일한 급여랑 퇴직금, 근속기간 동안 연차수당을 다 받을 수 있어.      


도근행, 서류를 밀쳐버리고.    

  

도근행    3백여 일 동안 형 음식과 형 배설물을 날랐어. 

고진옹    알아. 이게 네가 살 길이야. 진심으로 널 위해서야.  

도근행    형 이러는 거, 형수님도 아셔?

고진옹    …….

도근행    새벽부터 형 음식 장만하고 하루 종일 형 더울까 추울까 조마조마하고 죽도록 고생만 한 형수님도 아시냐고?

고진옹    네 생각만 해. 

도근행    형,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 

고진옹    아니, 넌 몰라.      


도근행, 차가워진 고진옹이 낯설고 무섭다.     

 

도근행    그 사람들 믿을 수 없는 인간들이야. 형 굴뚝에 있을 때, 불법 점거했다고 소송 건 사람들이라고. 형 내려오게 하려고 합의한다고 해놓고 말 바꾼 사람들이야. 설마, 그런 사람들한테 들러붙은 건 아니지?

고진옹    합의는 왜 못했는데? 자유롭게 두 발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왜 1년 넘게 아무것도 못 했는데?

도근행    (놀란 눈으로) 형.

고진옹    다른 뜻 없어.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야. 

도근행    원망하는구나.      


고진옹, 서류를 도로 도근행 앞에 내밀고.     


고진옹    사인해. 너 고생한 거, 나중에 내가 다 갚을게. 

도근행    갚을 거 없어. 사인할 일도 없고. 형, 우리한테 서운할 순 있는데, 오해야. 우리 정말 최선을 다했어. 

고진옹    그래. 

도근행    지금 형이 이러면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도 다 무너져. 

고진옹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도근행    왜 이러는데?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데?

고진옹    갑자기 아니야. 굴뚝에서 내내 고민했던 거야. 그리고 찾은 출구야.      


사이.     


도근행    미안해. 갈게.      


도근행, 일어난다.      


고진옹    납품업체에서 돈 받은 거, 횡령이야.   

   

도근행,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멈칫. 

천천히 고개 들어 고진옹 빤히 쳐다본다.      


고진옹    회사에서 이미 알고 있어. 그나마 내가 막은 거야. 밝혀지면 퇴직금이고 수당이고 없을 테니까. 

도근행    (비아냥거리는 말투) 형, 무섭다.  

고진옹    세상이 더 무서워. 너도 이제 네 살길 찾아. 

도근행    성호형이 마지막까지 형 걱정 제일 많이 했는데, 형이 이럴 줄도 모르고. 

고진옹    살아 있으면 좋았잖아. 가족도 잃고 직장도 잃고 돈도 잃고 목숨도 잃고. 

도근행    아니. 성호형은 죽지 않아. (손을 가슴에 얹고) 아직 여기 살아 있어. 

고진옹    정신 차려! 넌 아직 너무 낭만적이야. 현실을 직시해! 너 납품업체에 부품 몇 개 빼돌린 거 소송 걸리면 인생 쫑나. 그러면 아픈 홀어머닌 누가 모실 거야?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어. 우린 그저 좆나 가난하고 좆나 무식하고 좆나 시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해. 성호형, 너, 나, 다 착각한 거라고. 정의로 뭉친 주먹이다, 용감하고 씩씩하다,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애들 노래 불러가면서 계속 착각 속에 산 거야.      


고진옹, 도근행 손에 볼펜을 쥐여주며.     


고진옹    그나마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거야. 사인해. 부탁이다.     


도근행, 고진옹을 밀어내고 볼펜을 던져버린다. 

도근행, 일어나 뒤로 물러난다.      


도근행    그 부품, 우리 조 신참이 실수한 거 덮느라, 하청업체에서 더 받은 거야. 신참 엮지 말고 나 횡령으로 넘겨도 상관없어. 

고진옹    바보 같은 놈!     


고진옹, 볼펜 주워 와, 서류 위에 올려놓는다.     

 

고진옹    사인해, 여기에 사인하라고!

도근행    형, 그래도 난, 성호형이랑 형이랑 그 노래 부를 때가 제일 행복했다. 우리 언젠가 자동차부품으로 로버트 태권브이 꼭 만들자고…….     


도근행, 울컥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나간다.      


고진옹    근행아, 도근행!     


어느새 들어온, 홍성호. 1장과 같은 모습이다.  

홍성호, 한껏 웃으며 들떠 있다.      

홍성호    열정적으로다가, 열정적으로다가 움직여. 절대 지치면 안 돼. 여기 올라와서 축지법과 비행술 익힌다 생각해. (잰걸음으로 돌아다니며) 75m 상공 위에서 우린 늘 비행하는 거지. 날아다니는 거야.      

홍성호, 고진옹에게 손짓한다.      


홍성호    뭐 해? 생각보다 더 외롭고 더 씁쓸하지? 그럴 땐, 노래를 크게 불러. 시름을 다 잊을 정도로 크게.      

홍성호, 탑돌이 하듯 돌면서.     

 

홍성호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고진옹, 홍성호를 보며 미소 짓는데, 울컥한다.


홍성호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고진옹    형, 이제 오지 마.        


홍성호, 고진옹 손을 잡으며 일으켜 세운다.      


홍성호    달려, 달리라고. 달려. 가만있으면 괴로워. 자꾸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노래 커진다.

해맑은 홍성호, 고진옹 손을 잡고 비행기처럼 날며 노래 부른다.      


홍성호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고진옹, 거칠게 홍성호 손을 뿌리치고 주저앉는다. 

홍성호, 움직임과 노래 뚝 멈추고.     


고진옹    다신 오지 마. 제발.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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