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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난 이작가 Nov 15. 2022

꺼삐딴 리

12. 꺼삐딴 리

7     

미래자동차 정문 앞     

도근행 추모식.

‘정리해고는 살인’ ‘사회적 타살’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등의 푯말이 세워져 있고.

가운데는 도근행 사진이 놓여 있다. 

동료들이 하얀 국화를 차례로 사진 앞에 놓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진 앞에 일렬로 서서, 테이프에서 나오는 <로보트 태권V> 노래를 부른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이윤미, 일어나 추모사를 읽는다.      


이윤미    근행아. 들리니? 네가 좋아하는 노래야.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항상 다른 사람 위해 싸우던 널, 정작 우리는 안아주지 않았구나.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하루를 마감하고, 아픈 홀어머니 좋아하는 대봉 사드리며 행복해하던 너. 그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마저 빼앗긴 넌 얼마나 외로웠을까. 동료도 직장도 떠나가는 척박한 현실에서 넌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부디 그곳에선…….     


고진옹, 꽃기린 화분을 들고 터벅터벅 들어온다. 

뒤따라 허수인도 들어온다.      


이윤미    외롭지 마라.      


이윤미, 고진옹을 보고 말을 서둘러 맺는다. 

고진옹, 꽃기린을 도근행 사진 앞에 놓고 무릎 꿇는다.      


고진옹    꽃기린이야.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처럼 가시가 있어서,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라고 했지. 이놈은 기특해서 1년 내내 꽃을 피운다고. 이런 식물도 이렇게 환하게 꽃을 피우는데, 넌, 넌, 왜 그랬어? 바보같이 왜 그랬어? 

허수인    몰라서 물어?     


동료들, 고진옹을 향한 시선 차갑다. 

어디선가 고진옹에게 달걀이 날아온다. 고진옹을 비껴가 떨어진다.   

   

이윤미    당신, 오늘은 그냥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고진옹, 일어나지 않고.      


허수인    근행이가 널 형처럼 따랐잖아. 누가 1년 넘게 매일 밥 올려주고 똥 치워줘? 널 그만큼 좋아했으니까, 널 그만큼 존경했으니까. 

고진옹    근행아, 미안하다.  

허수인    너에 대한 신의가 그렇게 두터웠는데. 그런 네가 사람들 정리하고 나서니 충격, 아니 그 이상이었겠지. 세상이 무너졌겠지. 

동  료    (비아냥대며) 인사팀장님, 그만 가시죠. 인원 감축하느라 바쁘실 텐데.      


고진옹, 일어나서 동료들에게 말한다.      


고진옹    우린 너무 뒤처졌어. 우리가 너무 구닥다리 방식으로 투쟁하니까 이렇게 계속 당하는 거야. 

허수인    무슨 헛소리야?

동  료    오늘은 자숙합시다. 

고진옹    세상이 발전하면서 더 교활한 방식으로 우릴 옥죄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하잖아. 

허수인    그래서 안 당하려고 인사팀장 맡은 거야?

동  료    지금 잘잘못 따질 분위기가 아닙니다. 

고진옹    언제까지 죽을 건데. 언제까지 이렇게 등신같이 죽을…….     


동료, 달려와 고진옹에게 주먹을 날리고. 

이윤미, 말린다.      


이윤미    당신, 오늘은 이만 가. 

고진옹    놔.      


고진옹, 이윤미를 거칠게 뿌리치고.      


고진옹    여러분, 전 충분히 고통받았습니다. 고공농성 372일 하면서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졌습니다. 

허수인    네 핑계 듣고 싶은 사람 한 명도 없어. 

고진옹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고통받아선 안 된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바뀌는데, 우리는 왜 이 고통을 되새김질합니까? 우린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동  료    집어치워! 

고진옹    제가 1년 넘게 고공 위 십자가에 묶여 있는 동안 당신들은 뭘 했습니까? 당신들이 저에게 이럴 자격이 있습니까?

동  료    피해의식에 쩔었군. 

고진옹    우린 졌습니다. 패배를 인정하고 최대한 안전한 퇴각을 마련해야 합니다. 제가 그걸 해주려고 한 거라고요. 

허수인    아무도 네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      


‘시끄러워!’ ‘잘났다!’ ‘조용히 해!’ ‘정도껏 해라!’ ‘꺼져!’ ‘뻔뻔하다!’ 비방과 욕설들 난무하고. 달걀도 날아

온다.       


동  료    아름다운 배신은 없어! 

고진옹    배신? 난 배신한 적 없어. 

허수인    넌 분명히 알고 있어! 네가 지금 뭔가 켕긴다는 걸. 

고진옹    지금 내가 근행이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왜들 이러는데. 

동  료    죽을 만큼 힘들게 했겠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고진옹    뭐라고?     


고진옹이 동료에게 달려드는데 이윤미와 사람들 말리고.     

 

고진옹    난 아니야! 난 정말 근행이를 위한 생각이었어. 

이윤미    당신 가!

고진옹    윤미야, 너마저 왜 이래? 넌 내 진심 알지?

이윤미    …….

고진옹    윤미야.      


고진옹, 마음 무너지는데. 

이때, 안상태 국회의원 들어오고. 보좌관은 기자를 데리고 들어온다. 

안상태, 고진옹을 봤다. 허나,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모인 사람들을 둘러본다. 

보좌관 서둘러 마이크를 준비하고.   

    

보좌관    안상태 국회의원이십니다.   

   

보좌관, 마이크를 안상태에게 넘긴다.      


안상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가슴 아픈 소식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참담합니다. 사죄드립니다. 


안상태, 도근행 사진 앞에서 큰절한다. 

보좌관과 기자, 안상태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에 담는다. 

안상태, 동료들을 향해서도 큰절한다.     


안상태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서 먼저 간 자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세대에 이런 비극을 전달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자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돕겠습니다. 농성으로 인해 빚어진 손해배상청구소송이 각하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료들    (환호하듯) 안상태! 안상태! 안상태! 

고진옹    거짓말!     


고진옹, 안상태에게 다가가나 보좌관이 잡는다.      


안상태    여러분이 모두 복직되고 모두 정규직 되는 날,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그날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동료들    안상태! 안상태! 안상태!

고진옹    안상태! 이 꺼삐딴 리 같은 놈! 

안상태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흥분하지 마세요. 지금은 추모하는 시간입니다. 

          (고진옹을 가리키며) 저분은 일단 밖으로 내보내세요.      


보좌관이 고진옹을 내보내려는데, 고진옹 저항한다.      


고진옹    여러분, 저 말을 믿습니까?      


순간 어디선가, 고진옹에게 달걀이 날아온다.      


동  료    꺼삐딴 리는 너지. 기회주의자!     


더 많이 날아오는 달걀 세례. 

고진옹, 달걀 세례가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아채고 충격을 받는다. 

그대로 주저앉는다.      


허수인    (고진옹에게)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라고 했지. 

안상태    감정이 격해지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늘은 차분하게 동료를 보내야 합니다. 

고진옹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윤미 다가와 고진옹을 부축해 데리고 나가려 한다. 

계속 들려오는 동료들의 비난 속에 고진옹 억울함이 비어져 나온다.    

  

고진옹    이건 아니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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