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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난 이작가 Nov 15. 2022

낭만적인 개소리

09. 낭만적인 개소리

5     

고진옹 사무실      


고진옹,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서류가 든 파일이 쌓여 있다.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와 고진옹 앞에 앉았다 나간다. 

남직원 들어온다.      


남직원    지부장님.

고진옹    이제 지부장 아니야.

남직원    지부장님으로 돌아오십시오.   

   

고진옹이 서류를 내민다.      


고진옹    여기에 사인해. 사직서 제출로 인정이 될 거야. 권고사직으로 퇴사 월까지 일한 급여, 퇴직금, 근속기간 동안의 연차수당을 다 받을 수 있어. 재취업 전까지 실업급여도 받고. 

남직원    (서류를 밀어내며) 맘대로 하십시오. 해고를 시키든, 말든.

고진옹    내가 1년 넘게 굴뚝 위에서 깨달은 게 뭔 줄 알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이 방법은 틀렸다. 그들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고 우리도 그들을 이용해야 한다. 

남직원    고작 돈 몇 푼 받고 순순히 물러나주는 게 이용하는 겁니까?

고진옹    돈 몇 푼 못 받고 쫓겨난 채 끝날 수 있어. 성호형처럼.      


남직원 일어난다.      


고진옹    제발 퇴직금이라도 받고 재취업하는 방법을 찾아. 

남직원    친구랑 마누라는 그렇게 말할 수 있죠. 하지만 지부장님이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고진옹    널 위해서야. 진심이야. 

남직원    저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제 딸이 이런 부당한 세상에서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고진옹, 할 말이 없다.    

  

남직원    저도 진심입니다.      


고진옹, 남직원 잠시 서로를 쳐다본다. 

남직원, 고진옹의 따뜻한 눈빛을 피하고, 나간다. 

고진옹, 쌓여 있는 파일을 바라본다. 착잡하다.     

고진옹 사무실 조명 나가고 다른 장소에 있는 서지만에게 조명 들어온다. 

서지만, 매우 화가 나 있다.      


서지만    고진옹 팀장. 사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도대체 며칠 동안 한 일이 뭐야? 여기가 무슨 상담소인 줄 알아? 회사에서 백번 양보해서 퇴직금까지 준다는데, 단 한 명 사인도 못 받았다는 게 말이 돼?      


사이.     


서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회사에서도 방법이 없어. 합의고 뭐고 없다고. 퇴직금이고 뭐고 한 푼도 안주고 끊어내는 수밖에. 막말로 회사가 어려워져서 사람 줄이는 게 불법이야?      


사이.     


서지만    회사 이미지 쇄신하려고 베푸는 것뿐이야. 하지만 인내심에 한계가 왔어. 마지막이야. 더 이상은 안 돼. 당신에게도 더 이상 기회를 줄 수 없어.   

   

서지만 있는 곳 조명 나가고 고진옹 사무실에 다시 조명 들어온다. 

고진옹, 마른세수를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노크 소리 후, 여직원이 들어와 앉는다.      


여직원    고씨 아저씨.     


고진옹은 시종일관 친근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진옹    소식은 들었지?

여직원    설마 저도 구조조정 대상인가요?

고진옹    20% 감축으로 합의가 이루어져서 12,000명이 대상자야. 

여직원    합의한 적 없는데요. 

고진옹    (서류를 내밀며) 여기에 사인하면 사직서 제출로 인정이 될 거야. 퇴사 월까지 일한 급여, 퇴직금, 근속기간 동안의 연차수당을 다 받을 수 있어. 재취업 전까지 실업급여도 받고. 

여직원    거부하면요?     


고진옹, 대답 없다.      


여직원    고씨 아저씨가 부당해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고진옹    그래서 이런 절차를 밟는 거야. 안 나가겠다고 버티다가 퇴직금 수당도 못 받고 쫓겨날까 봐.  

여직원    왜 저죠? 영혼을 비우고 열심히 일만 한 것도 해고 사유가 되는 건가요?

고진옹    (서류를 보며) 1년 동안 조퇴 17번, 휴가를 5일 썼어. 외출도 잦았고. 

여직원    정말 그만두게 할 작정이군요.

고진옹    미안하다. 이게 널 위한 최선이야.      


사이.      


여직원    아이가 아파요. 돌 지난 애가 배밀이도 못 하고 청력 문제로 인공와우 수술을 두 번 했어요. 

고진옹    알아. 들었어. 퇴직금이 도움 될 거야.  

여직원    아픈 애 키우는데 앞으로도 계속 돈이 들 거예요. 

고진옹    …….

여직원    고씨 아저씨, 저 혼자 애 키우는 거 아시잖아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고진옹    퇴직금, 수당 다 챙기고 다른 일 찾는 게, 현재로서는 제일 좋은 선택이야. 괜히 복직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품고, 시간 낭비하지 마.   

여직원    다른 방법은 없나요?

고진옹    (고개를 끄덕인다)

여직원    아저씨도 다른 방법은 없었어요?     

 

고진옹, 침묵.           

고진옹, 사인할 부분을 여직원 앞에 내밀고, 펜을 둔다. 

여직원, 망설인다.      


고진옹    지금 이 기회 놓치면 병원비 못 구해. 빚을 언제까지 질 거야? 명심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아이부터 챙겨.      


여직원, 고진옹에게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데.    

 

고진옹    회사도 노조도 네 편이 아니야.  

여직원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다 같이 일하는 날까지 뭉쳐야 한다고. 

고진옹    낭만적인 개소리였어.      


여직원, 머뭇대다 결국 사인한다. 

여직원, 나간다. 

노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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