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일본인 2
처음 듣는 알람음에 눈이 떠진 아침.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에 물결 진 아침 햇살이었다. 커튼 대신 걸어둔 담요 틈새로 들어온 햇살은 때때로 울렁울렁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안경을 쓰지 않은 나안이라서일까, 기분 탓일까, 아니면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차원의 문이 보이고 있는 것일까.
잠시 비몽사몽 간의 상상을 즐기다 몸을 바로 하고 발 끝을 쭈욱 뻗어보았다. 1인용 요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밤새 웅크리고 누웠던 몸에 금세 기분 좋은 나른함이 퍼져나간다. 으으,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와 합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일상적인 아침이지만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おはよう (안녕)"
익숙한 목소리가 내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두 팔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의 티셔츠 가슴팍에 푸하고 숨을 불어넣자, 간지럽다는 듯 후후 하고 웃던 그는 조금 더 자자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미소 띤 얼굴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자, 이게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もう出勤準備しないと。今日月曜だよ(이제 출근준비 해야지. 오늘 월요일이야)"
"いってきます(갔다 올게)"
"うん、いってらっしゃい (응, 다녀와)"
짧은 입맞춤과 함께 하는 '돌아옴'을 전제로 한 인사.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뒤돌아 봐 다시 손을 흔들었다. 주차장이 보이는 방에서 그의 차가 잘 가는지 내려다보는데 이번엔 운전석의 그와 눈이 마주쳐 또 손을 흔들었다. 대체 손을 몇 번이나 흔들 생각이지. 일요일 오후,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지던 버스정류장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또 다른 형태의 헤어짐에 심장도 간질거렸다.
저녁에 또 당연한 듯 만날 수 있는, 그런 헤어짐.
어플만남, 한국인과 일본인의 국제연애, 연상연하, 선천적 그리고 후천적 문제, 일본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 한껏 날이 서버린 성정, 모태마름인과 비만인 (제길, 내가 후자다), 결혼식 없는 결혼 등등, 일일이 우여곡절을 겪어 나가던 남녀는 알게 된 지 딱 1년이 되는 어제, 혼인신고서를 내고 부부가 되었다.
주말 이틀 동안 이사를 하고 처음 새 집에서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새 가구는 아직 들이지 않아 전체적인 실루엣은 신혼집이라기보다 그냥 집만 바뀐 '우리 집'이다. 본가가 가까운 그의 짐은 아직 옷 박스 하나가 전부다.
어제부터 '남편'이란 어색한 명칭을 달게 된 그를 배웅한 뒤, 나는 지금 56㎡ 2LDK에 혼자 남아있다. 2개의 방과 하나의 거실(Living room) 겸 다이닝 키친(Dining kitchen)이 붙어있는 16평 남짓의 이 집은,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1, 2인용 주거구조다. 지은 지 20년 가까이 된 구축인데도 아직 구석구석 깨끗했고, 정남향으로 난 거실 깊숙이까지 부드러운 햇살이 들어와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이사가 막 끝난, (아니, 이제 시작인가) 테이프 하나 뜯지 않은 박스들 사이에 서서 이제부터는 여기가 우리 집이구나,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하듯,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어제 그제, 그렇게 짐을 날랐는데 다행히 근육통은 없다.
어제 마지막 짐은 9시 반이 넘어서야 들여놓을 수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가솔린이 바닥나는 바람에 주유소를 찾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걱정하실 것 같아 '다 끝나가니 걱정 마시라'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메시지는 이상한 답으로 돌아왔지만 '괜찮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돼요.'라는 용달기사님의 친절한 메시지에 금방 잊혔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짐들을 집 안에 넣고, 마지막으로 세탁기 호스를 연결하고 나서야 벌써 8시간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집에는 어제 삶아놓고 잊어버린 삶은 계란뿐. 편의점에서 우동과 오코노미야끼, 자양강장제와 레몬사와 두 캔, 참이슬 한 병을 샀다. 자양강장제는 피로회복, 레몬사와는 비타민C 보급, 참이슬은 올지도 모르는 근육통에 대비한 근육이완용이다.
접이식 테이블 위에 사 온 것들을 늘어놓고 먼저 자양강장제부터 털어 넣었다. 몸에 좋지 않은 술은 꼬박꼬박 마시려 들면서도 제 몸은 참 많이 아끼는 아이러니.
"건배"
부부가 된 후 첫 건배다. 기념할만한 날엔 역시 참이슬이어야 하지 않겠냐며, 아까 마신 자양강장제의 뚜껑을 소주잔삼아 맞부딪혔다. 이틀 전 포장재로 둘둘 싸 맥주잔 만하게 만든 '소주잔 덩어리'는 어느 박스에 들어있는지 모르겠다.
"신혼 첫날부터 이게 웬 궁상이냐."
"그래도 이런 거 싫지 않아. 뭔가 유니크하잖아."
공교롭게도 나도 같은 기분이다. 그러니 우리가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참이슬을 절반 정도 비웠을 때, '꼭 남편 분이랑 같이 열어보라'던 전 회사 동료의 선물이 떠올랐다. 크리스털 술잔 한 쌍이 새초롬히 누워있었고 둘의 입에서는 동시에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때, 우리는 앞으로도 예기치 못한 사건과 뜻밖의 행운,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지는 부조리의 혼재 속에 살아가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바로 이 56㎡ 2LDK 안에서.
우리는 이제 '너'와 '나'의 집합체가 아닌 '우리'라는 굴레 안에 들어왔고,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함께 지지고 볶고 울고 웃는 시간의 대부분은 이 집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런 순간들은 우리의 역사가 되어, 고스란히 이 집에서의 추억으로 기억되겠지. 신혼 때는 수저통에 숟가락 넣는 방향 같은 자잘한 습관 때문에 부딪히는 일도 있다는데, 우리도 그럴까?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나대로 또 할 일이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새로운 일상에 편안함을 덧칠하는 것.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박스 중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것을 하나 뜯었다. 전기포트와 그릇들이 나왔다. 이것들이 이대로 내 신혼살림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그릇을 하나 들어 만져보다가 아차, 싶어 다시 침실로 향했다. 아직 침대를 들여놓지 않아 그의 본가에서 빌려온 일인용 요와 담요, 내가 쓰던 이불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이다. 창문을 열어 신선한 아침공기로 환기를 하고 이불을 착착 개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것인 듯, 어제는 보지 못한 요 뒷면에는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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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일본인,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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