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지만 다육이는 키우고 싶어 #16
그동안 다육식물 케이스가 하나 더 늘었다. 해와 바람이 골고루 닿도록 가끔 화분 자리를 바꿔주는데, 그 과정에서 저들끼리 부딪히거나 손이 스쳐 잎이 떨어질 때가 있다. 혹시 기력이 있으면 잎꽂이로 다시 생명을 피워보라고 떨어진 족족 화분에 눕혔는데, 생각보다 발아율이 너무 좋았다. 특히 핑크베리는 유난히 쉽게 잎을 흘렸다. 미리 잎을 떼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면 내겐 나도 모르는 장풍 능력이 탑재되어 있는 건지. 손이 움직이다 만들어내는 작은 바람에도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잎이 잘 떨어지는 종일수록 잎꽂이가 잘 된다더니, 그렇게 핑크베리 화분만 여덟 개가 됐다.
새로운 케이스를 하나 더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야 뭔가 좀 이상함을 감지했다. 한 종류 화분을 이렇게까지 늘릴 생각은 없었는데. 내 식집사 생활이 내 의지가 아닌 핑크베리의 생명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다. 잎꽂이를 그만하면 되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주워 담는 나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또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프리티가 풀썩 고꾸라졌다. 웃자람도 없이 잘 자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잎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 같다. 화분 바깥쪽으로 몸을 뉘인 채 기묘하게 자라게 된 프리티는 가뜩이나 좁은 다육식물 케이스를 묘하게 압박하는 모양새를 띄게 되었다. 강낭콩 떡잎 같던 파키피툼은 어느샌가 화분 모서리에 편히 주저앉아 양 옆으로 활개를 치며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다. 테트리스처럼 틈새공간을 확보하며 화분을 끼워 맞추다 보니 이런 친구가 많아지면 화분 자리 로테이션도 까다로워진다. 다육 케이스는 더 이상 불리지 않기로 한 내 마음의 조마조마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하게 매일을 산다.
요즘 뭐가 참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집주인이 2년 전과 똑같이 '물가 급등, 인건비 증가, 주변 시세도 인상, 어쩔 수 없이'라는 워딩과 그래프가 들어간 편지를 보내왔다. 할 말은 많지만 꾹 눌러 담고 재계약과 이사 비용을 저울질해 본다. 그러던 차에 일본이 외국인의 재류기한 연장 수수료를 유럽 수준으로 5배, 10배 인상할 것이란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 미친! 요즘 횡행하는 외국인 배척주의에 화답하는 모양새라 정이 털린다. 스트레스는 몸으로 나타나 먹는 족족 토하기도 하고, 지금은 목에 담까지 왔다. 그렇게 맞이한 12월이다. 올해도 벌써 끝자락에 이른 지금, 나는 올해 내가 목표로 했던 것들을 다 이루었나? 돌이켜보면 반의 반도 다 못 했다. 올해 하반기의 대부분은 우울에 잠겨 지냈다. 내 삶의 문제들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핑크베리의 잎새 같아서, 후드득 떨어지고 호다닥 불어 나갔다.
걱정, 근심, 여분의 자극 없이. 원한대로 무탈하게 살고 싶은 바람과 달리 현실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하다못해 다육식물, 너마저. 딱 화분의 면적에서 벗어나지 않을 만큼만, 옆으로 눕지도, 굽지도 말고 딱 머리 위 하늘만 보며 예쁘고 반듯하게 자라는 거, 그게 뭐라고 그걸 해주지 않는다. 나의 우주도 그렇다. 이리저리 휘고 튀고,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나 파문을 일으킨다. 평안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삶의 변곡점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절망의 시간을 뒹굴다 보면 시선이 자연스레 타인을 향한다. 빡빡한 삶을 사는 건 나뿐인 것 같고, 다들 어른스럽고 아주 적절하게 대처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도' 아무런 성과 없이 살지만은 않았는데도, 마치 '나만' 이 엉망진창 수라장을 제어하지 못하고 한숨 섞인 낙제생 인생을 사는 듯 해 더 불행한 기분이 된다.
그런데 오늘 햇볕이 드는 곳으로 케이스를 옮겨주고 잠시 삐쭉빼쭉 못난이 다육이들을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겐 철저하게 '나'만 있다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었는데', '나만 못난 것 같은데' 없이 그저 '나'만.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해를 쬐고 바람을 맞고 물을 마시며 제멋대로 삐죽빼죽 살아가는 다육이들은 내 마음대로 되어주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삶을 소화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얘네들조차, 이 다육식물 케이스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세상 일이 어디 내 마음, 내 뜻대로만 굴러갈까.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 같으면 다들 집에서 비비디 바비디부 하고 있지 추운 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시험장으로 향하지도, 전화 건너편 보이지도 않는 거래처 직원에게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을 것이다. 물 위에 우아하게 동동 떠 있는 백조도 보이지 않는 곳에선 수면 아래에선 열심히 발을 동동거리고 있지. 나는 '물 밖에서도' 동동거리고 있을 뿐, 다 같이 동동거리며 산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 내 생각대로 되어주지 않는 다육식물조차, 자기들 나름대로는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내며 살아가니까 어쩌면 나의 지금이 내 생각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해도,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떼굴떼굴 굴러가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