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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이 정도의 거리

by 김소희

아들의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식 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살짝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올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1학년의 겨울방학식 날= 성적표를 가져오는 날이다.

아이의 성적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등때는 없던 시험점수와 등급까지 모두 밝혀진다. 초면에 쌩얼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오래전 지인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이의 성적표를 확인할 때 꼭 침대 옆에서 해야 해. 알았지?"

"왜?"

충격받고 쓰러져도 침대 위에 떨어질 테니까 크게 다칠 염려는 없다고 했다.

당시는 아이가 학교를 다니는 모습이 상상이 안될 정도로 꼬꼬마였을 때다.

당연히 성적표를 받는 날이 아주아주 멀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웃으며 넘겼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월은 빨리 지나갔다. 벌써 이렇게.

나는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내 자식인데 공부에 특별한 재능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내심 알아서 잘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솔직히 조~~ 금 있었다. 쪼오오오금

늦은 오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관문 앞에 있는 아이의 가방이 보였다.

최대한 '너의 성적표가 궁금하다'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내가 저녁밥을 준비하는 사이, 아이가 먼저 가져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저녁밥이 차려진 식탁에 온 식구가 모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가운데에 놓았다.

나는 밥을 한 수저 뜨면서도 온통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언제 말할까.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아! 맞다. 성적표 나왔어?" 다행히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갔다.

그리고 내 손에 들어온 성적표.

좋아하는 과목과 아닌 과목을 종이에 적힌 숫자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까.

우선 칭찬을 날렸다. 잘했다. 고생했다. 기특하다고 엄지 척까지.

다음이 고민이었다. 이렇게 칭찬으로 끝나야 하는 건지 상대적으로 낮은 과목에 대해 한번 짚어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2학년때는 열심히 하자는 말로 뭉뚱그려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들 생활에 내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는 말자.

서로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 딱 거기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부모를 찾을때 기꺼이 함께하는 것, 힘들 때 손 잡아 주는 것 등등이다.

아이도 나에게 이 정도를 원하겠지. 아니면 더 멀리서 쌍안경으로 봐야 보이는 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 아이보다 나를 더 신경 쓰자. 내가 다른 사람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마흔 살 넘어하는 공부에 집중하자. 과목도 많고 20년 만에 아니면 처음 접하는 과목들은 생소할 것이다.

겁이 나는 건 아니었다. 약간의 설렘과 걱정이었다.

난 가끔 장편소설을 읽으며 궁금증을 있었다. 이 글을 쓰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어떻게 이렇게 긴 글을 썼을까. 처음부터 계획하고 시작했을까. 쓰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까.

오늘 아침 읽은 H작가의 책 속에 궁금증에 대한 힌트가 숨어있었다.

이 장편소설의 시작은 단편소설이 이었다는 것이다.

하나씩 쓰다 보니 이야기가 이어졌고 또 이어져 장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생도 오늘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그 일주일들이 모여 한 달, 1년이 된 것처럼.

남걱정 말고 내 걱정을 하며, 속으로는 겁나더라고 겉으로는 당차게 하루하루 살자.

그런 날들이 모여 나의 어제가 되고 오늘이 또 어제가 되겠지.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하게 되는 인생 성적표의 점수가 엉망일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는 없게 그렇게 살아야지. 지금처럼.

열공하는 내 모습을 보면 아들도 열심히.. 하려나... (아아 욕심 버리기로 했지. 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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