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자기야 문 좀 열여줘.
문 밖에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는 어쩐지 숨이 차고 다급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자 커다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친 남편이 서 있었다. 힘이 빠졌는지 어깨는 구부정했다.
나는 한 팔을 쭉 펴 문이 닫히지 않게 잡았다. 신발 벗는 곳에 툭하고 내려놓은 상자는 소리만 들어도 꽤나 묵직하게 느껴졌다. 윗 뚜껑 부분이 불룩 올라와 제대로 닫지 못한 상태였다. 네 면이 힘겹게 어깨 동무를 하며 걸쳐있었다.
-이게 뭐야?
-고구마.
엥? 상자를 열자 뚜껑에 쌓여있던 흙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 안에는 손가락 두개만큼 얇거나 내 주먹 두개를 합친 것보다 큰 다양한 크기의 고구마가 가득 있었다.
-김대리네 시골에 텃밭있잖아. 지난주에 거기 갔었나봐. 하루 종일 고구마를 캐고 왔대.
-저번에 콜라비 줬던 그 집이야? 고맙긴한데 그냥 받아도 되는건지 모르겠다. 캐느라 엄청 힘들었을텐데.
나는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상자에서 갓 꺼낸 고구마를 박박 씻어 군고구마 전용냄비에 넣었다.
김대리네 고구마는 나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진짜. 맛이없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흙을 씹어먹는 맛이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걸 버릴수도 없고..언제 다 먹냐.
며칠을 고구마 튀김, 맛탕,닭갈비에 고구마를 왕창 넣기도 했다.
베란다를 열때마다 줄지 않는 고구마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동네 사람들한테 나눠 줘.
나는 잠시 우물쭈물하다 남편에게 말했다. 고구마가 맛이 없다고. 밤고구마인지 호박고구마인지도 알수 없을만큼 흙고구마라고.
내 입에 맛있어야 남들에게도 나눠 줄텐데. 이건 나눠 주기가 미안할정도였다.
요리조리 고구마 요리를 하다가 나름 꾸준히 먹을수 있는 괜찮은 방법을 하나 찾아냈다.
아침마다 3개의 고구마를 넣은 라떼를 만들어 아침 대용으로 먹는것이었다. 꿀이 엄청난 큰 도움을 주었다. 만약 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산더미 같던 고구마는 야금야금 줄어갔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생겼다.
초반에는 5-6개 먹으면 맛있는 고구마가 한개 정도 나왔다.
상자 중간정도 되니3개중에 한개 정도는 맛있는게 나타났다.
점점 라떼에 넣는 꿀 양이 줄었다. 상자 후반쯤 되자 꿀을 안 넣어도 될만큼 3개중 1-2개는 꿀고구마였다.
문득 작년일이 떠올랐다.
홍시 한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딱 봐도 전혀 익지 않은 감의 모습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후숙을 해야한다고 했다. 감끼리 서로 닿지 않게 베란다 바닥을 삥~둘러 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투명하고 맑은 감색으로 변해갔다. 선착순 번호가 있는 것처럼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변하는게 신기했다
한개 두개씩 먹는 재미가 쏠쏠했고 그 맛 또한 끝내 줬다.
손에 뭍는게 싫어서 단감만 먹던 나는 홍시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실패한 후숙도 있었다. 바로 아보카도.
과일가게 사장님께서 며칠 뒀다가 먹으라고 했다. 맨날 맨날 지켜보고 또 봤는데 겉으로 보이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보는 눈이 없는지 잘 모르겠더라.
너무 오래 두는건가. 아니면 더 있어야하나.
누구는 일주일 후에 먹어라 누구는 한달후에 먹어라는 후기가 다양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하나를 번쩍 들어 반으로 갈랐다.
이런.. 세상에나..샐러드 가게에서 먹던 민트색 속살은 온데간데 없고 얼룩말처럼 거무티티한 점들이 속을 가득채우고 있었다.
-이런 망..
이후로 과일집에서 아보카도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혹시 고구마도 위 과일들처럼 후숙이 필요했던건가?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는 고구마들이 점점 많아 지는 것으로 보아 합리적 의심이었다.
고구마 입장에서는 아직 맛있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막 먹고 판단한건 아니었을까?
꽃의 개화 시기가 다르고, 과일, 채소도 맛있는 시기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10대에 공부의 꽃을 피워야하고 20대에 직업이라는 결실을 맺어야 하고 부를 쌓으며 30대 40대를 맞이하고...
이 순서대로 안가면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사람이라서 예외를 주지않는 건 참~ 희안한 발상이다.
인생 초반의 나를 떠올려보면 내가 뿌리 채소인지, 덩쿨식물인지, 과일 나무 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확실한건 느리지만 천천히 영그는, 찬찬히 지켜봐야 매력있는 인간이다.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추며 더 맛이나고 빛이 나는 후숙인간이 되려한다.
나 스스로 재촉하지 말고 기다려줘야지.
고구마야~ 성급하게 판단해서 미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