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낭이 Mar 29. 2024

드디어 실리콘밸리로

인생에 늦은 것은 없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당시 모의고사 성적은 서울 대학교를 진학할 수 있을 정도로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나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수능을 6개월 앞두고

정부에서 기획한 한-일 공대 교환 프로젝트인, '일본 국립 공대'라는 것에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했던 이유는, 국비 전액 지원, 일본어 무료 교육과 같은 휘황찬란한 혜택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의 20대를 해외에서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특히, 3년 전에 이 '일본 공대'에 붙은 사촌누나의 말에 의하면,

이 제도 자체를 고3 학생들이 잘 관심 갖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붙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본인도 따로 준비를 안 했음에도, 정원 미달이 나서 합격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공대' 공부에 돌입했다.

해당 시험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지원했을 때는 이미 3년 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그 제도를 알고서 1년 전부터 관련 학원에서 집중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떨어졌으면 좋았을 걸.

어쩌다 1차가 애매하게 붙고, 2차는 완벽하게 떨어진 나는,

그 이후 남은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수능을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재수를 해야 했다.


재수를 하던 당시에 나는 내 인생이 마치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었다.

모두가 학교에서 즐거운 캠퍼스 생활을 즐기는 그 시점에,

매일 같이 재수학원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써야 한다는 사실은

마치 내가 인생의 패배자인 것 같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때는 어렸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1년간의 재수를 했고,

결과적으로는 고3 당시 감히 상상치도 못한 수준의 수능 점수를 받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일은 대학원 박사 과정 시절에도 일어났다.


2016년 박사 초년차에,

나는 운이 좋게도 당시 연구하던 분야에서 좋은 저널에 논문을 연달아 두 편 연속 게재할 수 있었고,

이를 좋게 봐주신 교수님은 나를 따로 불러

혹시 미국으로 post doctor, 이른바 박사 후 연구원인 포닥을 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셨었다.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제안, 즉 미국에서 포닥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여러 환상을 심어주기 좋았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에서 취업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당시 연구하던 분야를 가장 잘하고 있던 기업은 I사였는데,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헛바람을 장착한 나는 진지하게 나의 커리어를 고민하면서

어쩌면 나중에 I사에서 일할 수도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나는 그 당시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미국에서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찾아보다 보니,

다짜고짜 미국으로 포닥을 갔다가 교수 임용도, 미국에서 채용도 안 되는 경우에는

오히려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 국내 취업을 할 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

또 미국의 살인적인 물가를 견디기에는 미국에서의 포닥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해 둔 인터넷상의 글들을 보게 되었던 게 그 당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과연 내가 거기서 잘 해낼 수 있을까? 영어도 이렇게 못하는데....'

'미국에 가고 싶었다면 진작에 준비를 했어야지!'

'어떻게 감히 내가 I사에서 일을 할 수 있겠어, 그건 정말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야.'


등등..


패배주의적인 자기 합리화가 가장 먼저 마음속에서 피어났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흘러 박사를 졸업한 후에 나는 S전자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여러 기막힌 우연이 겹친 끝에 미국 샌디에고에 위치한 Q사로 이직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그 당시 미국 포닥으로 가지 않은 '덕분'에 미국 회사로의 이직 기회를 받은 셈이 된 것이다.


마치 재수를 한 덕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S사에서 미국 Q사로 이직이 확정된 그 해 12월, 연구실 송년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나의 미국 회사 이직 소식을 들은 몇몇 후배들이 나에게 찾아와 이런 질문을 했었다.


"어떻게 하면, 선배님처럼 실리콘밸리에서 일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나에게 꽤나 당황스러웠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나는 딱히 미국 회사 이직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말로 너무나도 운이 좋게도' 추천을 받아 인터뷰 기회를 얻어 이직에 성공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미국으로 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고 (지금은 좀 더 많은 방법들을 알게 되었지만)

두 번째 이유는 내가 가는 곳은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Q사의 본사가 있는 샌디에고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 친구들의 질문의 목적이 미국 내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

실리콘밸리든 샌디에고든 나에게 큰 상관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들이 내가 가는 곳을 '실리콘밸리'라 명명한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실리콘밸리라는 단어가 주는 일종의 상징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리콘밸리.


이 얼마나 폭력적인 다섯 글자인가.

엔지니어 누구나가 한 번쯤은 일해보고 싶은 곳,

전 세계 유명한 테크회사들이 다 모여 있는,

현 세대 모든 최신 기술의 총아라 부를 수 있는 이 실리콘밸리라는 곳은

어쩌면 그 당시 질문을 하던 그 후배들에게도,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게 된 나에게도

꿈만 같은 상징적인 커리어 무대 였을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기묘하다.


그렇게 막연하게 해외에서 20대를 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고3 학생이,

돌고 돌아 나이를 먹고, 결국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때, 재수를 하지 않고 일본 공대에 취업했으면 성공한 인생이었을까?

아니면, 박사 시절 미국으로 포닥을 갔다면 성공한 인생이었을까?


인생에 어찌 정답이 있겠느냐만은, 내가 인생을 살면서 느낀 점은 이렇다.

그 당시 했던 아쉬웠던, 바보 같아 보였던, 혹은 실패라고 느꼈던 순간들이 지나고 나서 보니,

결국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순간이었고,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결과였던 셈이었던 거다.


항상 살다 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선택을 하는 것이 항상 힘든 이유는 내가 그 순간에 하는 이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데,

결국에는 그 선택의 결과는 내가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또 당시에는 최고의 선택이 아니어서 좌절했던 순간들이, 지나고보니 더 나은 지금의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선택 후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혹시 아는가. 그렇게 내가 있는 최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의 선택들로 이뤄진 결정들이 아스라이 쌓이고 쌓여,

그 언젠가 내가 희미하게 원했던 그 순간으로 나를 운명처럼 다시 데려가 줄 지 말이다.


이전 09화 회사와 의연하게 이별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