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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낭이 Mar 22. 2024

회사와 의연하게 이별하기

한 명의 프로페셔널 엔지니어처럼

박사과정 대학원 시절 일이다.

수 차례 '산학 장학생' 면접에서 떨어진 후, 합격한 SK하이닉스 산학 장학생.

회사는 입사 예정자인 나에게 많은 혜택을 지원했다.

최신형 노트북부터, 매달 월급 개념의 장학금, 생일 때마다 지급된 생일 선물과,

SK 하이닉스 중국 공장 견학까지.


그저 박사 과정 학생인 나에게는 너무나도 분에 넘치는 대접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졸업 후 삼성전자로 취업하는 길을 선택했고,

회사에는 해당 산학 장학생을 취소한다는 메일을 보내야만 했다.


어떻게 메일을 보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회사와 정식 계약을 하고, 이행하려 했으나 계약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파기할 있는 거야.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프로 운동선수들을 생각해 봐.

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돈을 받고 일하는 순간 너 역시 이제 한 명의 프로 엔지니어인 거야."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신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었지만,

당시의 한낱 학생 신분의 내가 그렇게 까지 생각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공손하고 예의를 갖춰 회사에 계약 파기 통보를 했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https://brunch.co.kr/@damnang2/56


지금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A사의 입사가 결정되고, Q사의 퇴사를 통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서,

나는 다시 어떻게 '프로답게' 잘 마무리를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뭐래도 Q사는 나에게 미국에서 일할 기회를 준 고마운 회사였다.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워킹 비자,

가족들이 편안히 미국으로 있도록 비즈니스 항공을 포함한 여러 이주 지원을 제공해 주었고,

도착 후에도 이주 서비스와 여러 보험 혜택, 그리고 4인 가족을 위한 일정량의 연봉을 지급해 주었다.


또한, 우리 팀에는 Q사에 입사 당시 나를 위해 추천을 해주신 K수석님 계셨고, K수석님을 소개해주신 이전 직장 S사의 J수석님도 계셨다.

갑자기 이 팀을 떠나 버리면, 그분들에게 혹시 피해가 가거나 그분들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생겼다.


여러 가지 감사하고 걱정스러운 감정들에 쌓여,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마치 나의 마음을 아셨다는 듯 한 통의 메세지를 보내셨다.


프로는 모든 판단을 의연하게 결정한다.
세상과 가족을 더 좋게 만드는 방향으로 그저 걸어갈 뿐이다




처음 통보는, 나의 매니저 M에게 했다.

그는 샌디에고에 거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1-on-1 call을 신청했고,

call이 시작되자 나는 그에게 video call을 하기를 요청했다.

이런 진지한 이야기는 (너무나 어려웠지만)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잘하지 않는 video call이었기에 아마 그도 뭔가 조금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었다.


"지금부터 매우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어렵게 운을 띈 나는, 그에게 내가 떠나야 하는 이유들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부터 M에게 이야기해 왔던 나의 두 가지 걱정.

한 가지는 내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였고 다른 한 가지는 '돈'에 대한 것이었다.

이직 결정 전에도 나는 이 두 가지가 내가 가지고 있는 걱정거리라고 M에게 이야기해 왔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이 두 가지 이유를 근거로, 내가 떠나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게 된 것이다.


한참을 듣던 M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먼저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쉽지 않았을 텐데. 난 너의 결정을 존중해."


괜히 더 혼자 걱정을 해서였을까,

예상하지 못한 그의 따뜻한 말에 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함을 느꼈다.


M은 나의 이런 결정에 당황스러워했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프로다운 의연한' 모습으로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응원해 주었다.

그 역시, 이 바닥에서 25년을 살아왔던 프로였던 것이다.


그렇게 call을 끝내고 나니, 갑작스럽게 sr.director인 R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M에게 전해 들었다면서, 평소와 같이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해주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혹시 어떤 조건을 해준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최대한 '프로답고 의연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렇게 나의 퇴사 절차가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를 이 팀으로 추천해 주신 K 수석님을 만나 퇴사를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K 수석님은 나와 여러 가지로 인연이 많이 겹쳐 계시는 분이기에,

M과 R에게 말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적 노력이 필요했다.


갑작스럽게 저녁 식사를 요청드리고서 이런저런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조심스럽게 나의 퇴사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K 수석님은 나의 퇴사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해주시고, 축하해 주셨다.


"정말 잘 되었어요.

나는 혹시나 담낭씨가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건가 하고 걱정했는데,

좋은 회사에서, 더 좋은 직급과 연봉을 받고 이직하는 거면 너무나 축하할 일이죠!


언젠가는 해야 했을 일인데, 조금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나에게 전혀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건네주신 마지막 말씀.


"이곳은 미국이에요. 이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 아마 팀원 모두가 담낭씨의 이직을 축하할 거예요.

다른 건 생각하지 말아요. 담낭씨의 앞으로 커리어와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세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어쩌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의연한 프로의 모습들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의 과정들은 정말 물 흐르듯 지나갔다.


매니저 M은 나에게 차례 call을 요청했고,

혹시 우리 팀에서 연봉을 인상하여 카운터 오퍼를 제공하면 내가 팀에 남을 수도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인상안에 대해 M이 말하기도 전에, 나는 그 오퍼를 거절했다.

이미 모든 비자 이전 절차가 완료되어 다시 Q사에서 일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이미 나의 마음 또한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떠나는 이에게 마지막까지 금전적으로 협상을 하는, 미국 회사는 정말로 프로페셔널한 세상이었다.


퇴사를 확정 짓고, 남은 다른 팀원들에게도 그 소식을 전했다.

모두가 나의 결정을 축하해 주었고, 응원해 주었다.


이직이 잦은 미국 회사인 만큼,

나의 퇴사는 그들에게 놀랍고 아쉽지만 또 그만큼 당연한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나 역시 조금 더 의연한 프로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과정들을 마무리하고, 나는 아버지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 의연하게 퇴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회사의 마지막 날,

나는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작별의 인사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내가 퇴사 이야기를 하며 수도 없이 말했던 그 문장,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문장으로 나의 Q사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I am sure our path will cross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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