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삼성에서 꽤 많이 우울했던 이유

근데 사람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법

by 담낭이

사실 분야에 대한 고민은 삼성에서 일할 때부터 해오던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박사 졸업 후,

삼성에 입사하고 맡았던 업무가 생각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Yield Explorer라는 툴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쉽게 말하면 데이터 관리 분석 툴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앞에서 설명했던 Diagnosis data를 대량으로 저장하고 통계분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툴.

그 툴을 관리하는 것이 나의 주요 업무였다.


툴 관리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잡다한 업무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이 툴은 삼성의 툴이 아니라,

반도체 소프트웨어 회사로 유명한 Synopsys의 툴이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1. 문제가 생기거나 툴에 대한 불만 사항을 접수하면

2. 나는 그것을 Synopsys 담당자와 이야기하여 해결책을 만들고

3. 그 해결책을 다시 전달하는 일.


이런 일이 대부분의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 성취감이라는 것도 거의 없었고,

박사 때 내가 해왔던 DFT 설계 관련된 일과도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나에게 업무 관련해서 요청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툴 이슈 문제로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중에는,

나를 정말 본인 시다바리쯤으로 여기고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내가 지금 이렇게나 바쁜데 너 때문에 이 일을 못하지 않느냐' 하는 듯한 태도.


그리고 언젠가,

나와 같이 일하는 선배에게 반쯤 푸념하듯,


"빨리 똘똘한 친구가 와서 저 대신 이 툴을 관리해 줬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하자

"똘똘한 친구면 이 툴 관리하면 안 되지. 똘똘한 일을 해야지"

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진지하게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

그럼에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그런 일이 나의 일이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 홀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3층 식당 가는 길에 있던 대강당에서

"삼성 사내 박사 졸업 축하식"

이라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인지 그 축하식을 보는데, 내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누군가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축하받을 기쁜 일인데,

그들은 박사 학위를 받고서 이렇게나 기뻐하고 있는데,


나는 왜 지금 이리도 기쁘지 않은 걸까.

나는 대체 박사 학위를 뭘 위해서 받은 걸까.

겨우 지금 하는 이런 일을 위해서 나는 그 고생을 하며 논문을 쓰고 박사를 받은 것인가?


이런 복잡한 생각이 계속해서 내 마음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와이프 앞에서 서글프게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있다.




그랬다.

요새 즐겨보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 인사팀장 놈의 대사처럼,

나는 확실히 자아가 비대한 놈이 맞았다.


582936463_17926335303159012_7123497630903635703_n.jpg


내가 뭐라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냥 하라는 일 하고, 그걸로 돈 받고,

받은 그 돈으로 가족들 먹여 살리면 되는 건데.


내가 뭐라고.


똘똘하지 않은 일을 하는 이유는 내가 똘똘하지 않기 때문일 뿐인데.

그 알량한 박사 부심을 내세우며,

내가 우울하니 마니, 일이 즐거우니 마니 하는 이야기를 왜 계속 지껄이는 건지.


내가 뭐라고 말이다.




여튼 자아가 심히 비대했던 나는

삼성에 있던 시절에도 분야 변경, 즉 하고 있는 일을 변경하려 많은 노력을 했었다.


Diagnosis 관련 일을 할 거라면 차라리 화끈하게 이 일을 주력으로 하는 팀으로 옮기던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회사에 복귀할 때 쯔음,

함께 설계 쪽 분야로 변경을 요청할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 가끔 만나던

하이닉스에서 일하는 내 선배가 있는 곳으로 회사 자체를 옮겨버릴 것인지.


하지만 그 어떤 쪽도 나로 하여금 적극적인 동기 부여를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나는,

왜 분야를 옮겨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야를 옮긴다고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 옮긴 곳이 꼭 업무적으로 만족스러울 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내 인생은 정해진 인생 아닌가!?


삼성이든 하이닉스든 대기업에서 일하며,

절대 잘릴 일 없는 이곳에서

임원은 되지 못한 채 어중간한 수석쯤으로 남아서

지금처럼 계속 불만만 쏟아내다가

50대가 넘는 순간부터

협력업체로 가든 퇴사를 하든 어떠한 결정을 내리겠지.


마치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내 선배들 처럼 말이다.


그런 나에게

커리어 고민이나 분야 고민은 배부른 허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즈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 J 수석님이 삼성으로 복귀하셨고,

그리고 정말 내 인생에서 예상치도 못한 또 하나의 기회가 선물처럼 내려왔다.


그게 바로 미국 퀄컴으로의 이직 기회였다.


https://brunch.co.kr/@damnang2/71





참 사람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우습게도,

그 당시 그렇게 싫어하던 Yield Explorer 툴 경험은,

결과적으로 나를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 당시 퀄컴은 전 세계에서 가장 Yield Explorer를 활발하게 사용하는 회사였고,

놀랍게도 입사 1년 차 시절,

Yield Explorer 담당자로서 고객 응대를 하러 갔을 때 만났던 사람이,

나의 퀄컴 시절 senior director였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AMD에서도 이 Yield Explorer 경험을 통해

매니저와 senior director에게 많은 부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이다.

AMD 일하던 당시 senior director는,

본인 팀이 사용하는 자체 in house 툴과 Yield Explorer 간의 성능 비교를 하고 싶어 했고,

그 팀 중 유일하게 Yield Explorer를 사용해 본 사람이 나였기에,

나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데이터와 방법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싫었던 그 일이 나에게 큰 자산이 된 셈이었다.


미국에 오고,

실리콘 밸리에 오고 나서야 다시 Diagnosis에서 DFT로 분야 변경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 때,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그동안 진심으로 고마웠다 Yield Explorer."

keyword
이전 02화왜 나는 1년 만에 이직을 꿈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