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Nov 09. 2022

아무렇게나 내린 이민 결정

어쩌다 미국에 살게 된 한국 남자 (ep. 3)

스물일곱이 돼서야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을 만큼 나는 그전엔 이민 따윈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하기보단 내가 있는 곳을 더 깊이 있게 알아가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나고 자란 서울을 벗어난 적도 많지 않다. 친척들도 대부분 수도권에 거주해서 명절 같은 때에 의지와 상관없이 서울 밖을 방문할 일도 없었다. 와이프와 결혼 전 데이트하던 때 처음으로 부산을 가봤을 정도였으니 내가 얼마나 한 곳에 머무르길 좋아하는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대학생 때 교환학생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은 있다. 해외에 대한 동경보단 나중에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진지하게 알아보기도 했지만 금전적 문제로 포기했다. 마음을 접던 그때, 아쉬움보단 안도감이 먼저 다가왔던 걸 기억해보면 아마도 사는 곳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인과 결혼하고도 난 여전히 미국에서 살게 가능성은 깊이 있게 고려하지 않았다. 가끔 방문은 하겠지, 이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때 나는 지방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던 와이프를 위해 다니던 회사에 그쪽 지사로 발령을 요청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서울 밖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미 배우자란 변수를 고려해 큰 결정을 내려놓고도 나는 여전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머지않아 그녀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게 될 거란 걸.


분명 결혼할 때만 해도 같이 한국에 살기로 했는데,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후 딱 1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와이프는 내가 먼저 이민에 관심을 보였다고 하고, 내 기억엔 와이프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 같고. 최악의 커뮤니케이션 예시로 쓰일법한 의사결정이었다. 미래에 한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민을 위한 대사관 스케줄을 잡고,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극찬하며 미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확실하게 정해진 것도 없이 우리 두 사람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서둘러 한국생활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미국으로 이끌리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출국일자가 임박해서 나는 점차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간 살아오며 내가 내린 결정들엔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대학의 학과라든지 취업분야라든지, 큼직한 결정엔 반드시 그걸 뒷받침할 근거들이 있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심사숙고하는 내가 사는 나라를 바꾸는 걸 아무렇게나 결정한다는 것이 갑자기 나답지 못한 일이라 느껴졌다. 그래, 가지 말자. 나는 새로운 곳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미 둘 다 직장을 그만둔 뒤였지만 아직도 스물예닐곱이었기에 다시 취업하면 될 일이었다.


진지하게 이민을 취소하자고 의논하려던 차에 와이프가 나에게 소식을 전했다. 몇 개월 전 강사 자리에 지원했던 미국의 한 주립대로부터 채용 합격 통보를 받았다고. 그게 출국 이틀 전이었다. 이민을 망설였던 이유가 한국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큰 골칫거리가 사라진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대로 미국에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무조건 떠나겠다던 게 얼마나 정신 나간 결정이었는지 그제야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어찌어찌 반절의 계획은 세워졌으니 떠나도 괜찮겠단 생각도 들었다.


결혼 후 한국에 같이 정착해서 살기로 한 합의는 미국에선 한국에서 만큼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 이뤄낸 만큼은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똑같은 성공이면 미국이 보상이 더 클 것이란 구체적이진 않지만 매우 그럴싸한 믿음과 함께. 한쪽이 직장을 잡았으니 일단 먹고사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라 봤다. 새로운 곳에 대한 적응 또한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지냈던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게 무척 싫었을 뿐이다. 어디든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모두가 내뱉는 그 말에 나도 동의했다. 그런 갑작스러운 자신감을 갖고 우린 출국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미국에서의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때의 결정은 여전히 충분한 근거가 없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결정이었다.

이전 02화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올린 결혼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