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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Nov 16. 2022

3년 동안의 와이프의 외벌이

어쩌다 미국에 살게 된 한국 남자 (ep. 5)

내가 돌아가는 비행기표 없이 미국에 왔을 때는 나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부부는 하나라고 일단 와이프가 알칸사의 한 주립대에 강사로 취직했으니 일단 반절은 자리를 잡은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이민을 선택하며 3년을 못 채우고 그만둔 직장이었지만, 첫 사회생활이었기에 나름대로 힘들었던 점이 많았었다. 그래, 당분간 좀 쉬자. 조금은 쉬어도 돼. 이런 마음가짐이 얼마나 쉽게 나태함으로 이어질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여느 학생들처럼 내 학창 시절의 대부분은 수능 준비로 채워졌고, 대학에 입학한 뒤 두 학기를 마친 후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물론 방학 땐 아르바이트. 그리고 전역 후 한 달 뒤 학교로 돌아가 휴학도 없이 남은 여섯 학기를 내리 다니고 졸업했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졸업식이 있던 그 주부터 서울의 한 공공기관에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해 그해 하반기에 같은 공공기관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조금은 쉬어도 돼. 이 말이 내 안에서 메아리칠 때마다 그동안 쉴 새 없이 달려온 과거가 점점 선명해져 갔다. 그럴수록 내가 내렸던 선택들이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십 대에 맘껏 놀아본 적이 없다는 억울함마저 느껴져 이십 대의 끝자락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두기로 했다. 그래 봐야 미국 시골에서 할 수 있는 건 맘껏 먹고 자는 것뿐.


그 사이 와이프는 주립대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녀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빠듯하진 않지만 여유롭지도 않은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 단조로운 생활이 계속되며 어느새 해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반년 가까이 거실 한편에 놓인 화분처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다. 그 누구도 화분에게 무얼 하라고 하지 않듯 와이프는 나에게 일을 구하란 말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었다는 사실만이 나이게 무언의 압박을 주어 무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 반년은 정신을 더럽혔던 온갖 찌든 때를 벗겨내는데 써버린 셈 치고, 이제부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지.


하지만 너무 쉬었던 탓일까? 다시는 머리를 쓰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무직을 떠올리면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다시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논밭이 많은 알칸사 답게 주변에 식품 관련 공장이 많았다. 시급도 괜찮고 항상 일손이 부족해 성실히 다니면 승진의 기회도 많다고, 누군가 나에게 알려줬다. 무언가 새롭게 준비해야 하는 사무직보다 별다른 기술 없이 곧바로 시작할 수 있는 공장일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넌 머리 쓰는 일을 해야 돼", 와이프가 말했다. "싫어, 영어도 못 하는데 사무직은 안 돼", 내가 받아쳤다. 와이프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엄청 똑똑한 줄 안다. 나에게 사무직을 찾으라고 말할 때도 이런 인재를 공장에서 일하게 할 순 없다는 그럼 진심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똑똑하다는 건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이란 걸 — 타고난 사람도 있긴 있지만. 나는 일단 와이프가 일하는 주립대에 컴퓨터과학 석사과정에 지원했다. 주립대의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결과에 대한 걱정 없이 다시 느긋하게 기다리며 공장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이어갔다.


그러나 내가 결정적으로 공장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신체조건이었다. 채용절차에 문제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교대근무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전에 몇 달간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 뒤 심하게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교대근무 스케줄을 보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와 몸 중에 어느 하나를 괴롭혀야 한다면 나의 경우엔 좀 더 내구력이 있는 머리를 내주는 편이 생존에 유리하단 판단이 섰을 즈음 지원했던 석사과정에 합격했단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1년 동안 혼자서 생계를 책임졌던 와이프는 그 뒤로 내가 석사를 마칠 때까지 2년을 더 그 생활을 이어갔다. 꼬박 3년 동안의 외벌이였던 것이다. 다행히 나는 졸업과 함께 취업했고, 이번엔 나의 외벌이가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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