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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Nov 12. 2022

여기가 정말 내가 상상한 미국이라고?

어쩌다 미국에 살게 된 한국 남자 (ep. 4)

내가 이민을 떠난 그날은 광복절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벌써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더위는 공항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을 끈적한 습기로 채우고 있었다. 두 번의 경유지를 거쳐 마침내 우리 부부는 처가가 있는 펜실베니아의 작은 시골 동네에 도착했다.


이민을 떠나기 바로 며칠 전에서야 와이프가 직장을 잡았기 때문에 처가 식구들에게 미리 자세한 내용을 알려줄  없었다. 그저 대학교 강사 일을 구했다, 그 정도만 알려준 뒤 비행기에 올랐다. 자세한 내용은 선택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다. 왜냐면 와이프가 일하게 될 주립대는 스펠링마저 특이한 알칸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가 "알캔자스"라 잘못 읽었던 Arkansas 주는 영화 <미나리>의 배경이다.


처가 식구들은 평생을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왔기에 텔레비전만이 유일한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창구였다. 그들에게 알칸사는 온갖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은 무법천지의 미국 남부일 뿐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곧 알칸사로 떠난단 사실을 알렸을 때 할머니는 눈물마저 보이셨다. 나는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국 남부의 이미지는 늪에 사는 악어뿐이었다.


며칠 뒤 처가를 떠난 우리는 꼬박 열일곱 시간의 운전 끝에 마침내 알칸사에 위치한 목적지에 도착했다 — 면허가 없던 나로 인해 와이프 홀로 운전하게 한 미안함이 있다. 우리가 살게 될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조수석에 앉아 가는 내내 나는 상상했다. 어쨌든 주립대도 있고 행정구역상 도시로 분류되는 목적지를 지난 신혼여행 때 가봤던 필라델피아라는 대도시의 축소판으로 머릿속에 그려보려 애썼다. 둘 다 도시고 크기만 다르지 않은가? 지극히 이공계열 출신다운 접근법이었으나 결론은 완전 틀렸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 둘 중 누구도 도착했단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알칸사의 상징인 붉은 맷돼지 (Razorbacks)

분명 도시라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그 지역엔 바로 며칠 큰 비가 내려서 도로 여기저기 흙탕물이 고여있었다. 와이프와 나는 정말로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수차례 확인했지만, 내비게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운전을 더 해도 좋으니 제발 길을 잘못 들었던 거라고 믿고 싶었다. 랜드마크라 해봐야 10층도 안 될 법한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처가 식구들이 걱정한 범죄가 문제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떠올렸던 악어를 먼저 만날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새로운 시작에 조금이나마 들떴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고 참담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도저히 여기서 살 순 없을 것만 같았다. 초록빛 잔디가 가득한 뒤뜰 대신 종종 물이 범람하는 논밭이 도로 건너편에 있는 집에서, 범죄는커녕 사람 자체를 보기 힘든 동네에서, 그렇게 나의 이민생활은 시작됐다. 여름이면 몇 번이고 토네이도 경보가 오기에 핸드폰을 항상 주시해야 했고, 그렇다고 겨울이 따뜻하지도 않았다.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곳은 전혀 없었지만, 차를 타도 15분이면 동네 어디든 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도시였다. 모든 것이 주립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거대한 기숙학원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 나는 일반 학원조차 가본 적이 없지만.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상상했던 미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라 했던가? 나는 계획에 없던 석사과정을 위해 와이프가 일하는 주립대에 입학하는 것으로 적응을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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