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을 유일하게 수긍할 수 있었던 드라마
2020년 여름에 방송되었던 tvN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를 당시에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던 시기라 못 봤었다. 정주행은 하지 못하고, 가끔 재방송을 할 때마다 보는데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상당히 잘 만든 가족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만병통치약처럼 등장시키는 ‘기억상실’을 소재로 한 숱한 한국 드라마 중 거의 유일하게 수긍할 수 있는 설정이었던 것 같다.
오전에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이 드라마가 하고 있길래 보게 되었는데 기억이 스물두 살 시절로 돌아간 아버지 상식은 설레는 표정으로 “22국에 9438 숙이씨집 전화번호,… 기억나요? 숙이 씨도 기억나요?”라고 묻자 현재 냉랭해진 부부사이로 이런 대화가 불편한 진숙은 “기억 하나도 안 나요.”라고 대답하니 상식은 “어떻게 그런 걸 잊어요?”라고 볼멘소리로 묻는 장면을 보고 내 기억 저편에 있는 전화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정말 오래전 전화번호인데 거짓말처럼 떠오른 것이다. 초등학교 무렵부터 꽤 오랫동안 사용했던 우리 집 전화번호였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운 그 시절이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생각났다.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나쁜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는 축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내서 지금의 단출함이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든다.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불행의 순간이 끝나는 것처럼 행복의 순간도 끝이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도 일생을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의 총량은 어쩌면 같은 게 아닐까. 인생의 70% 이상이 행복으로 가득 찰 수는 없겠지 싶은… 그만큼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즐거웠던 것 같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가는데도 나처럼 때때로 눈물을 쏟는 사람이 흔한걸까.
어려서부터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비소설, 다큐멘터리로 취향이 바뀌었다. 등장인물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오는 장면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부모님 때문에 드라마 내용과 무관하게 목이 메어오기 때문이다.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차가운 내용일 가능성이 높지만 감정의 요동 없이 볼 수 있어 선택하게 된다.
부모님은 내가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서 걱정이 안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친구나 직장에서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그런 편이라고 수긍했는데 부모님이 아예 이 세상에 안 계시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피가 멈추지 않고 철철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자각이 들 때마다 슬픔에 휩싸이는데 드라마나 영화처럼 예측할 수 있는 변수를 차단한다 하더라도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기에 일상에서 짧은 한 순간에도 불쑥 떠오르는 그리움은 통제할 수 없어 마음이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