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뎃은 남극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을까?

삶의 아름다움은 물질로 채울 수 없는 것

by Rosary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은 “엄마의 성장영화”라고 할 만한 영화다. 아니, 엄마뿐 아니라 아빠와 그들의 딸까지도 성장한 “가족 성장 영화”라고 해야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버나뎃의 딸 비의 내레이션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누가 선물을 줬다고 가정해 보자. 그게 마음에 쏙 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면 처음에는 정말 행복하다. 다음 날에도 행복하지만 전날만큼은 아니다. 1년 뒤에는 목걸이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뇌는 왜 이러는 걸까? 살아남기 위해서다. 원래의 것에 익숙해져야만 새로운 위협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이건 분명 뇌의 디자인상 결함일 거다. 감사함이나 기쁨 대신 위험, 생존 신호나 탐지하다니. 아예 리셋된다면 좋지 않을까? 이제 인간들은 짐승의 습격을 받을 일이 없으니까.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위험 신호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삶의 아름다움은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아빠도 엄마의 보석 같은 면을 보지 못하게 됐겠지.


내가 도를 터득한 건 아니지만 물욕이 사라져 버린 게 바로 이 대목일 것이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내가 버는 돈의 절반 정도는 생활비로 드렸었다.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이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내가 돕는 게 당연하지, 아니 돕는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다.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인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작용이 있었다. 버는 돈의 절반을 부모님께 드리다 보니 남는 돈을 알뜰살뜰 아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종의 면죄부 같은 게 생긴 기분이랄까. 이 돈은 그냥 내가 쓰고 싶은데 써야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 같았다. 그게 내 경제관념이 부족해진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혼자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급여의 절반 이상을 집에 보내는데 그 나머지 절반으로 아등바등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었다. 사치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면서 씀씀이가 꽤 과감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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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해를 살다 보니 <어디 갔어, 버나뎃>의 내레이션 대목이 크게 와닿았다. 새 물건을 사도 기분 좋은 건 그때뿐이고,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면 시큰둥해지는 것, 쇼핑이야말로 참 부질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규모는 많이 다르겠지만 부자들도 쇼핑을 하다 보면 아무리 비싼 물건을 산다고 해도 그 물건들이 쓸수록 즐겁고 신나는 기분으로 꽉꽉 채워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삶의 아름다움은 물질로 채울 수 없는 것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가족, 그들과 함께 보냈던 따뜻한 순간,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줄만 알았던 가족이 사라지고 나니 물질적 만족감이라는 게 정말 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옆에 있다면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아낌없이 표현하면서 보석같이 빛나는 삶을 누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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