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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Feb 10. 2023

감정 발췌록 02: 해운대 텍사스 퀸콩



  얼마 전 부산에 다녀왔다. 아름다운 것들도 많이 보고 잠도 푹 자고 무엇보다 오래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남포동 구시가지에 위치한 비건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영도대교를 가로질러 그리웠던 흰여울문화마을을 찾아갔고, 손목서가에 앉아 몇 권의 책을 뒤적이며 스며드는 볕을 잠시 쬐기도 했다. 보고 싶은 전시를 보기 위해 쓰레기매립지와 미술관이 함께 있 섬에도 다녀왔다. 밤의 해운대를 한참동안 거닐기도 했고, 한겨울에 땀을 흘리며 달맞이언덕을 오르기도 했다. 남해와 동해의 경계라던 달맞이길은 이름처럼 아름다웠다. 어딜 걷고 있어도 수평선이 보였고 마치 장난감처럼 모노레일 위를 달리는 전차들도 볼 수 있었다. 잠깐 이곳에 살아봐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행을 좋아한다.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떠날 때마다 좋다. 차로 몇십 분 달려나가 볼 수 있는 교외 풍경도 좋고,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을 가로질러 한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을 향해가는 것도 좋아한다. 살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 중 하나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한 성당에 앉아 건축 사이를 투과하던 빛을 만끽하던 순간이었다. 여행이 다 끝나갈 무렵, 아무르강을 거닐 때쯤엔 횡단열차의 전 노선을 종주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로 꿈 같은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간에 내게 행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에 하나다. 풍경 낯설면 낯설수록 좋았다. 낯선데도 따뜻하게 느껴지면 더 좋았다.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되뇌며 오직 구글지도에 의지해 배회하는 것이 좋았다. 어쨌든 아무리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더라도 연초마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 나만의 연례의식인데, 올해는 다소 게 떠나게 된 편이다.

  사실 이번 여행 전후로 한두어번 아팠다. 마치 아직 이 자리에 있는데 먼저 달려나가는 몸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보다 앞서 달리는 몸이라는 표현(혹은 감각)김혜순 시인의 책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나온 말로 이 상태를 설명하는 것에 적격인 것 같아 잠시 빌려와봤다. 또한 김혜순 시인은 같은 책에서 병이란 몸이 쓰는 답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나는 지난 몇 달간 몸(혹은 그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계속해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듯한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엇이 원인일까 되짚어보니 답이 간단하게 도출되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보냈던 세계 하나가 금씩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집에서 넘어지셨던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게 된 이후로,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것들이 무섭게 떠밀려오는 것 같았다. 규칙적으로 묵주기도를 하고 야구를 좋아하시며 하고 있는 것은(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잘하고 있냐고 차분하게 묻던 할머니는 유리문 너머로 우리들 얼굴을 보며 이름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병원을 오가는 몇개월 동안 아빠마저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만 했다. 사실 행정상 프리랜서들에게 1,2월은 가혹할 정도로 일이 없기에, 매우 초조했다. 게다가 겨울은 극장 지원사업기간도 아니기에 극장식구들도 견뎌내야하는 가혹한 계절이었다. 폭설과 동파와 지긋지긋한 고지서 덕분에 나와 주변 두가 한껏 예민해졌다. 예술인복지재단이나 타 지원사업 홈페이지를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고, 어떤 제안과 기획들 속에서 잠시 힘을 입어 이런저런 일을 꾸며보다가도 삶 속에서 미처 해소되지 않고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번씩 이불 속에서 눈을 꽉 감아버렸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비공개 일기장에나 올려야 할 법한 이 글을 굳이 브런치에 게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별로 큰 이유는 없고 쓰거나 읽거나 읽혀지는 그 짧은 순간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 극장 식구들, 그리고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누군가들은 아마 각자의 방식대로 인간의 시간을 견뎌내거나 받아들이거나 때론 허물어지듯이 무너지곤 할 것이다. 때론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삶에 집중하려고 할 것이다. 막연함의 지옥에서 벗어나 구체성을 얻고자 할 것이다. 하루를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조탁하고자 할 것이다.  나도 내 태도를 시간 위에 자연스럽게 맡겨보기로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삶에 집중하려하면 할수록 아득히 먼 곳으로 이탈하고 싶다는 감각이 들곤 했다. 실은 내 발이 광주(혹은 물리적/심적 고향으로 상정하고 있는 모든 가치들)에 못박힌 것 같아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고 싶어서, 혹은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의 강제성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서 나는 스스로를 열심히 쪼개고 있었던 것 같다. 못박혀있다고 여겨지는 그 부위를 계속해서 후벼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당장 새로운 배경의 심리적 현실을 마련하고 싶었고, 다소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게 스스로를 구해내는 과정일 것 같다. 마도 내가 새로운 현실이라는 것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 아마 첫번째로여행일테고, 두번째로 좋은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이 감정과 상황을 구조화해두는 글이겠지. 그게 시가 되었든, 에세이가 되었든, 분절된 방식의 메모가 되었든 말이다. 하지만 노트북 화면에서 오래 배회했고, 그래서 여행을 시급하게 떠나야했다. 이렇게 연초의 리듬을 방치하고 싶진 않았다. 내겐 환기가 필요했다. 꽉 막혀있는 것들을 비우고 새롭게 채워야 했다. 새롭게 쉴 수 있는 숨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먼저 회복해야 내 주변의 상황들도 가다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여행 첫날, 퇴근하자마자 극장 밖으로 뛰어나갔고, 택시를 불러 터미널로 갔고, 멀미에 시달리며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속을 게워냈다. 배를 쥐고 엎드린 자세에서 본 내 신발이 너무 더럽게 보였고, (그리고 이 글은 모래먼지에 더러워진 운동화 두 켤레를 빨며 시작된 것이다.) 오랫동안 쌓여있던 피로가 단숨에 몰려오는 느낌 간신히 전철을 타고 남포동지 힘들게 갔다. 그때까지 괜히 왔나 싶었지만 숙소까지 가서 따뜻한 물로 씻고, 편의점에서 사온 한 도수의 술을 두어 모금 마시니 뭔가 회복되는 것만 같았다. 다행인 것은 나는 익숙한 곳보다 낯선 곳, 즉 친구의 집이나 여행지에서 깊게 자는 타입이었고, 곧바로 긴 잠에 들었다. 그것은 오랜만의 숙면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의 여행은 아주 좋았던 것 같다.

  정말 신기하게도, 오직 낯선 곳을 거닐어야 회복되는 마음이 있는 것일까.  좋았지만 역시 제일 좋았던 것은 해변이었다. 해변에서는 발이 푹푹 빠지기 때문에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겹치고 겹쳐져 하나의 문양처럼 일렁이는 것이 좋았다. 바다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평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특히 해운대의 해변을 거닐 때는 자연히 두 명의 작가가 생각났는데, 한 명은 김혜순 시인이고 또다른 한 명은 나의 스승님이시기도 한 이승우 소설가였다. 언젠가부터 바다를 마주하게 될 때마다 자연히 바닷가에서 태어났다던 스승이 생각났다. 그는 종종 바다에서의 유년시절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해주기도 하고 글로 묘사하기도 했는데, 그와 그의 이야기들로부터 받은 영향이 너무 컸기에 나는 환하게 빛나는 윤슬과 수평선, 시간에 따라 밀려오고 빠지는 파도의 움직임을 볼 때마다 당연히 선생님이 생각날 수 밖에 없었다. 바다, 빛, 창문.. 이렇게 흔한 문학적 이미지들은 괜히 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 흔한 것일테지만, 자칫 죽어가는 비유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그것들은 결국 가장 선명한 이야기를 택해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같은 말을 골라도 특별한 상황에 배치해야한다. 나도 바닷가나 해변, 파도로 몇 편의 시를 쓰거나 산문적 묘사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바다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심상은 스승이 조탁해낸 장면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뒤라스도 생각난다. 나는 뒤라스의 텍스트를 내 방식대로 해체해 몇 편의 시를 써봤는데, 이상하게도 내 시에서 나오는 바다는 항상 캄캄하거나 광막한 정경에 의지한다.) 사람마다 평생에 걸쳐 품고 갈 풍경이 다를테지만, 선생님은 아마 하나의 근원으로 바다를 생각하고 계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 어떤 시절이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리움은 그리움일 뿐이다. 문학, 특히 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전개해야한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와중에 불현듯 기억나는 것은, 언젠가 극장 팀장님과 함께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던 새벽에, 회고는 중년의 정치인이나 하는 것이라는 조언이 든든하게 좋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혜순 시인도 악스트에 실린 인터뷰 말미 쯤에, 당신의 시집이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바로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답한다. 돌아보지 않는 것. 나는 그 말에 기대 몇번 용기를 내거나 있는 힘을 다해 혼자가 되려하거나 기꺼이 스스로 무너지곤 했다. 마침 김혜순 시인이 지난 부산비엔날레 때 이곳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끌어온 시가 있기에 옮겨적어본다. 또 이 시가 나의 여행과 지난 몇 주를 축약하고 있다는 생각에, 지금의 감각이 그리워질 때면 이 시를 인덱스를 들여다보듯 보게 될 것만 같다.  



  해운대 텍사스* 퀸콩**



  모두 잠든 밤이면 나는 빌딩들을 들고 옵니다


  청소부들이 초록 울타리를 치고

  쓰레기 하치장 팻말을 세우고

  빌딩들을 기다립니다


  해변의 모래 위에

  엎어진 동상처럼 빌딩들이 누워 있습니다

  붕대가 너덜거리는 빌딩, 혀가 아픈 빌딩, 머리에 피를 흘리는 빌딩, 하이힐을 신은 빌딩

  들여다보면 다 사연이 아픈 빌딩

  낮에는 빌딩들에게도 물이 졸졸 오르내리고 피가 윙윙 돌고 굽이굽이 얼굴도 있었는데


  그리하여 시선도 있었는데

  내가 바라보기 전에 먼저 나를 바라보았었는데


  파도는 깊은 물속에서 올라온 줄에 손목이 묶인

  수억만 개의 손가락입니다


  해변으로 밀려와 나가고 싶다!

  나가고 싶다! 울다가 사라지고

  그러면 또 다른 손가락들이 몰려옵니다

  파도는 이미 사라져서 벌써 사라집니다


  나는 빌딩들이 가득히 쌓인 해변을 걷습니다


  깊은 밤 장막속의 깊은 밤 장막속의 깊은 밤 장막속에서는

  큰 것은 작아지고

  작은 것은 커집니다


  창문 안에는 환한 빛 따뜻한 침대

  식탁에서 기다리는 우리 엄마 우리 아빠

  하지만 내가 죽는 날 함께 할 식사

  나는 우리 집이 너무 작아

  철대문을 책처럼 옆에 끼고 걷습니다


  나는 이제 빌딩들이 떠나버려

  망각만이 즐비한 밤의 황무지에 들어섭니다

  나는 버드나무 가지로 엮은 귀신처럼

  새 소리, 공룡 소리, 온갖 여자짐승 우는 소리를 내며

  뛰어갑니다 가끔은 날아갑니다


                                           -<해운대 텍사스 퀸콩>, 김혜순


*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Paris, Texas, 1984)를 차용.

**킹콩(King Kong)의 여성명사형 Queen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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