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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Nov 19. 2022

[중편소설] 소설 없는 소설(12)

14) 지난 실패담을 끄집어내서 주석 노트를 쓰다 보니 점차 실패에 중독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나도 바틀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남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중얼거리다가 사라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자 엔리께 빌라 마따스가 아이디어를 하나 던졌다. 지금까지 쓴 주석 노트를 제본해서 브라우티건 도서관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브라우티건 도서관이요?”


 “네. 브라우티건 도서관은 출간되지 않은 원고만을 소장하거든요.”


 엔리께 빌라 마따스는 그렇게 말하고 피에르 바야르의 허벅지 아래에 깔린 자신의 다리를 꺼내 주무르면서 코에 침을 발랐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는 또 다시 내 침대 발치에 꾸깃꾸깃 앉아 있었다. 자꾸만 좁은 침대 위로 불러들여서 미안했지만, 엔리께 빌라 마따스의 제안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브라우티건 도서관에 소장된, 실패한 종잇장들 사이에 내 주석 노트를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글쎄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는 당황한 듯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미래 유령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피에르 바야르가 무릎을 세워 앉으면서 말했다.


 “어떻게요?”


 “그러니까 주석 노트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요. 지금은 당신 영혼이 노트에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서 미래 유령이 노트를 들여다보기 힘들고 당신에게 말을 걸기도 힘들죠. 반면에 브라우티건 도서관은 말하자면 유령들이 떠돌기 좋은 곳이죠. 잠재적이고 유령적인 가능성들이 고여 있는 장소니까요. 유령들 틈에 당신 원고를 던져두고 몇 달이나 몇 년 후에 다시 가 보면, 원고 사이에 미래 유령들이 메모를 끼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다음번에 진짜 대단한 작품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요.”


 “바로 그거예요. 그게 브라우티건 도서관의 존재 이유죠.”


 엔리께 빌라 마따스가 덧붙였다.  


 우리는 밤새 좁은 침대에서 자세를 몇 번이나 바꿔 앉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있었다.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버몬트 주 벌링턴 시에 있기 때문이었다.  


 벌링턴 시에서 브라우티건 도서관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벌링턴 시는 인구가 몇만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석 노트 세 권이 제본되어 있는 트렁크를 들고 브라우티건 도서관에 갔다. 

브라우티건 도서관의 사서는 바이다라는 여자였는데, 해사한 얼굴로 커다랗고 둥근 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바이다가 아름답기 때문인지, 출간되지 못한 원고를 껴안고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 도서관에는 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출간되지 못한 원고의 저자들은 간절한 혹은 이미 패배한 얼굴로 자신이 쓴 원고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바이다는 그 말을 곰곰이 듣고는 두꺼운 장부에 원고의 제목과 저자를 적었다. 그러고 나면 알려지지 않은 저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서가에 원고를 꽂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더벅머리에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은 남자 뒤에 줄을 섰다. 그는 갓난아기를 안듯이 자기 원고를 살포시 안아 들고 있었는데 그는 아마도 워터멜론슈가 같은 데서 송어낚시를 하고 온 것 같았다. 그에게서 비린내가 은은하게 풍겨서 나는 숨을 아껴서 쉬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별안간 고개를 홱 돌려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책을 보관할 자리는 없을 거요.”


 그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지저분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보시다시피 책장이 꽉 찼으니까요. 내 책이 마지막일 겁니다. 더 이상은 받지 않아요.”

나는 까치발을 들고 책장을 훑어보았다. 금방이라도 원고 더미를 토해낼 듯이 책장이 꽉꽉 들어차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아시죠? 도서관에서 그렇게 안내를 했나요?”


 나는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도서관에는 바이다 외에는 도서관 직원이라고 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안내를 하지는 않았지만, 괜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말을 듣는 편이 좋을 거요. 믿을 만한 데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누구한테서 들었는데요?”


 “유령들한테서.”


 “유령들이요?”


 “그렇소. 저기 화장실 뒤쪽, 저기에 교차통신 기계가 있다오.”


 “교차통신 기계라면….”


 나는 기억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는데, 워터멜론슈가에서 송어 낚시를 하고 온 남자는 고개를 까딱하고 더 이상의 친절은 베풀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홱 돌렸다. 그러니까 교차통신 기계라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두 세기 전에 영국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기계인데, 그 기계를 사용하면 자동기술기법으로 유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죽은 사람들을 이 땅에 부활시키려고 했다면 영국의 지식인들은 죽은 사람들이 있는 저 세계에 가닿고 싶어 했다. 여기에 교차통신 기계가 있다고? 나는 목을 쭉 빼고 화장실 뒤쪽을 쳐다보았으나 시야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 원고를 받아 줄 자리가 없다니, 그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브라우티건 도서관은 출간되지 않은 원고라면 그 어떤 원고라도 받아 주는 것이 운영 원칙이니까.


 “죄송하지만 더 이상은 원고를 받을 수 없어요. 보시다시피 도서관이 폭발 직전이거든요.”

바이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워터멜론 송어 남자는 곁눈으로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원고를 들고 서가를 누볐다. 


 “그럼 어쩌죠?”


 “브라이티건 도서관은 이제 온라인으로 운영될 거예요. 도서관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면 온라인 공간에 저장될 겁니다.”


 바이다는 나에게 도서관 이메일 주소가 적힌 작은 종잇조각을 건넸다. 그러나 온라인은 유령들이 거주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지 않나. 온라인에 저장된 원고에 미래 유령들이 무슨 수로 메모를 남기나. 고작 이메일 주소를 받자고 미국까지 날아왔다니.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바이다에게 뭐라고 따질 수는 없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바이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에 줄을 선 예닐곱 명의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 말한 것과 동일한 안내를 했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말을 다시 한번 들었다. 워터멜론 남자가 후련한 얼굴로 서가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안 됐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화장실 뒤쪽, 그러니까 교차통신 기계가 있다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듯이 가리키고는 얄밉게 멀어져갔다. 이제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교차통신 기계를 써 보는 수밖에. 미래 유령이든 과거 유령이든 누구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수밖에.


 교차통신 기계는 전화박스 같은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얼핏 사각형 금고처럼 보였는데, 금고 맨 위에는 긴 자 같은 것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철제 피아노선 같은 것이 반원형으로 달려 있었으며, 본체에는 알알이 뜯어낸 키보드 자판 같은 것이 사열 횡대로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쓰는 건가. 혹시나 싶어서 워터멜론 남자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았고,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바이다와 눈이 마주쳤다. 바이다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낸 것 같은 얼굴이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바이다를 제외하고는 딱히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이건 교차통신 기계가 아니에요.”


 바이다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네? 그럼 뭐죠?”


 “타자기에요. 빈티지 타자기죠. 폴 오스터가 사용했던 거랍니다.”


 나는 교차통신 기계를, 아니 폴 오스터가 사용했다는 빈티지 타자기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영락없이 타자기처럼 보였다. 


 “폴 오스터가 이걸로 소설 속 캐릭터들의 영혼을 불러냈으니까 교차통신 기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바이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나를 달래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바이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이것은 교차통신 기계가 분명하지 않나. 그렇지 않으면 워터멜론 남자가 내 원고가 보관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데. 나는 바이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땀방울은 바이다가 닦아 내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솟아올라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아마 바이다의 말은 절반 정도만 맞는 말이 아닐까. 그러니까 폴 오스터는 교차통신 기계를 타자기로도 썼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렇게 많은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이다. 폴 오스터는 교차통신 기계에 손을 얹고 유령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썼을 것이다. 마치 필경사처럼. 그 순간 바이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


 바이다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말했다. 나는 바이다가 몸을 내게 기댈 수 있도록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병원에 전화 좀 해 주세요!”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완성되지 못한 원고의 저자들을 향해 외쳤다. 


 “자, 천천히 심호흡을 해 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바이다와 함께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흐읍, 산소를 들이마시고, 후우,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흡입한 산소는 혈액을 타고 돌아 뇌세포에 도달했고, 활력을 되찾은 뇌세포는 내게 명령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면 교차통신 기계를 들고 얼른 도서관을 빠져나가. 그러니까 바이다가 아기를 낳는 동안 너는 소설을 끝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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