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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10. 2024

예술분과로서의 나르시시즘(10)

시간은 쏜살과도 같아서 다시 몇 달이 흘렀다. 

울리희는 야외 테라스가 달린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수염을 기다렸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처음으로 수염을 만나는 것이었다. 

수염은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나타났다. 수염은 예수처럼 수염을 길렀고 예수처럼 세례를 받았고 예수처럼 예수를 믿었다.

수염은 지난 일을 회고하며 아무래도 그때는 귀신에 씌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니 있지도 않은 정자가 있지도 않은 난자와 만나면 실제로 아이가 생긴다고? 그건 그냥 귀신 방귀 뀌는 소리 같은 거였다고, 의료진들을 모아놓고 대차게 방귀를 뀌었으니 너무 망신스러운 일 아니었냐고, 그러고 보면 그 사람들도 참 극한 직업이라고. 그러고는 새벽 예배의 효능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울리희는 수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커피를 마셨다. 울리희는 그 모든 일이 한바탕 소동극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공정에선가 문제가 발생했을 뿐이다. 그게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을 뿐이다. 울리희는 울리히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수염에게 말해줄까 싶기도 하였으나, 새벽 예배를 다니고부터 허리가 좋아졌다고 말하는 수염에게 구태여 그런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울리희는 꿈에서 울리히를 보았다. 울리히가 꿈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울리히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이 저 스스로 일어나 뛰어다니는 것처럼 저 홀로 자라고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주워 먹고 풀숲을 

어 다니다가 맹렬한 기세로 자신을 막아서는 사마귀를 보고 한바탕 웃어젖히는 것이었다울리희는 울리히를 번쩍 들어 안아주고 싶었으나그는 꿈 세계의 주민이 아니었고 그저 관찰자 시점으로만 존재했으므로 그럴 수 없었다울리히를 꿈에서 현실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울리히를 품에 안고 그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추어 줄 수도 있을 텐데.

울리희는 이중 부정 기법이 하나의 완결된 기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허구와 허구가 만나 만들어낸 실재가 현실 세계에 뿌리 박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법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울리희는 아직 알지 못했다. 울리희는 한숨을 내쉬고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속이 쓰라렸다. 울리희는 여전히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햇볕에 달구어진 따뜻한 바람에 꽃잎이 휘날렸다. 나는 울리희를 위해 꽃잎들 사이로 나뭇잎 몇 장을 흩뿌렸다. 그 나뭇잎들은 살랑살랑 춤을 추듯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울리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무사히 착지했다. 울리희는 나뭇잎을 주워서 가만히 읽었는데, 울리희는 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 걸까. 울리희가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 역시 알지 못한다. 울리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뭐 하는 거야?

수염이 물었다.

울리희는 수염을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뭇잎을 입에 넣고 천천히 잘근잘근 씹었다. 수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성경책을 손에 꼭 쥐었다. 울리희는 작게 으깨진 나뭇잎을 아메리카노와 함께 꿀꺽 삼켰다. 

그러나 울리희가 삼킨 나뭇잎은 완전히 소화되지 않을 것이고, 트림을 유발할 것이다. 울리희는 끄윽 트림할  것이고 냄새는 불쾌할 것이다그렇지만 울리희는 코를 벌름거릴 것이다킁킁 냄새를 맡고 그 냄새 입자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것이다꿈 세계에 잠겨있는 울리히를 호출하기 위하여 그렇게 할 것이다.

아멘.

수염은 언제 시작했는지 모를 기도를 마쳤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울리희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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