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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10. 2024

예술분과로서의 나르시시즘(9)

양수가 바닥나서 바로 분만을 해야겠네요.


의사는 간호사들에게 서둘러 분만 준비를 지시했다.


무통 주사 좀 놔주세요. 제발요!


수염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다. 


지금 주사 놓으면 아기한테 안 좋아요. 자, 이렇게 숨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따라 하세요.


수염은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심호흡을 했다. 아마도 라마즈 호흡법 같은 산모들을 위한 호흡법이었을 것이다. 

울리희는 수염의 턱수염에 허옇게 침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면도라도 하고 오는 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수염이 수염을 깎는다면 더 이상 수염일 수가 없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라마즈 호흡법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진이 빠진 건지 수염은 잠잠해졌다. 울리희는 거즈로 수염의 콧수염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수염은 탈진한 짐승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수염의 모습에 울리희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미안해. 울리히만 건강하게 태어나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게.


울리희가 수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울, 울리히라니?


수염이 가래 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뱃속에 내 아이 말이야. 말 안 했던가? 아이 이름을 울리히로 지었거든.


울리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염이 소리를 질렀다. 


누구 맘대로 울리히야!


수염에게 다시 진통의 파도가 몰려왔다. 덕분에 울리희는 수염의 분노를 피할 수 있었다. 수염은 또다시 무통 주사를 놔달라고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산모님, 정신 차려요. 자, 이제 힘줍니다. 하나, 둘, 셋!


간호사는 마치 자신이 아이를 낳는 것처럼 온몸에 힘을 주는 시늉을 했다. 수염을 어르고 달래고 호통을 치는 복합적이고도 난해한 치어리딩이었다. 울리희는 관중석으로 후퇴해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꼬무락거렸다. 

기도라도 해야 하나 싶었으나 그런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치열한 경기가 두 시간쯤 지속되었고, 마침내 우승 팡파르가 울리듯이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분만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울려 퍼졌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게 뭐야?


아니 뭐, 뭐죠?


의사와 간호사들은 허탈한 듯 웅성거리면서 납빛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아이는 건강한가요?


울리희가 의사와 간호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물었다.


보호자분, 자 잠시만 비켜주세요.


간호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울리희를 관중석으로 후퇴시켰다.

울리희는 어리둥절하게 뒤로 물러나 의료진들이 우왕좌왕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간호사들은 수염의 아랫도리와 등허리, 이불과 베개, 침대 아래까지 샅샅이 뒤진 다음에 자신들이 입은 가운에 달린 주머니까지 뒤집어 살폈다. 

의사는 다급히 초음파 기기를 끌고 와 탈진한 수염의 배에 젤을 바르고 초음파 막대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의사와 간호사는 서로 눈을 맞추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의사는 패잔병처럼 넋이 나간 얼굴로 아이의 완전한 실종을 울리희에게 통보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기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밀실에서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이 벌어졌다는 결론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는 처음부터 아기는 없었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수염은 아기 울음을 연상시키는 아주 커다란 방귀를 뀌었을 뿐이라고. 처음부터 수염의 뱃속에 들어있던 것은 아기 형상의 가스로, 울음소리와 함께 분출된 가스는 공기 중으로 와해되고 말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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