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아침에 눈 뜨고 습관대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데 날벼락같은 카톡이 와 있었다.
'내년에는 제 아들이 별채에서 살게 하려고 합니다. 계약기간 끝나면 이사 부탁드립니다
–제주카펜터'
추석 연휴로 블로그 일을 한 주간 쉬면서 평소에 쓰고 싶었던 글에만 몰입하던 나날이었다.
시월에 에세이를 다 마무리하고 십일월엔 소설을 써야지, 카페나 오두막집에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서 글을 쓰고 또 고쳤다.
글 쓰다 보면 문득 집 주위 풍경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어쩌다 천국에 와 있는 건가,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내가 황당하면서도 아련한 마음이 찾아오곤 했다. 약간 들떠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라니. 대체 어디로?
언젠가 이사를 가야 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로 닥치니 막막했다.
사실 오두막집에 이사 온 후부터 줄곧 이날을 걱정했었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고 이웃들은 내 가족이 아니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햇볕이 반짝거리는 잔디밭과 정원 울타리에 우거진 나무들 너머로 푸른 바다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제주카펜터의 북미식 목조주택과 귤창고 카페 건물은 모두 다 주인이 있고 나는 지나가는 떠돌이일 뿐이니까.
그럴 때면 이곳을 떠나면 어디로 가야 하나 답도 없는 생각을 했다.
제주에 연고 하나 없지만 좋은 이웃과 마당개가 있어서 이곳에서는 외로움을 타지 않았는데.
시나리오 작가 지인이 그냥 이 오두막을 네가 사면 어떠냐고 했던 말도 그런 내 마음을 엿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육지에서 우울하게 지낼 때 ‘감사하라’는 충고를 들을 때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감사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감사하란 말인가. 영혼 없는 껍데기처럼 몸속 어딘가 텅 빈 구멍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하늘이 너무 아름답고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잔잔해서, 근심 없는 개들이 노니는 풍경이 평화로워서 마냥 쳐다보다 보면 그저 바라볼 수 있는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두막집 정착하기 전에 집 보러 돌아다니던 때, 인터넷을 부지런히 뒤져서 모르는 사람들과 약속을 잡고 하루 에너지를 다 쏟으면서 막상 가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갑갑한 성냥갑 같은 다세대 주택 투룸이나 오션뷰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전선 너머 한 뼘도 안 되는 먼바다가 보이는 원룸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예의 바르게 감사하다며, 생각해 보겠다며 실망한 표정 안 보이려고 애썼다. 다섯 평도 안 되는 마당에 수영장이랍시고 타일 욕조 같은 걸 만들어놓은 옹색한 타운하우스도 있었고 집주인이 아닌 관리자에게 목돈을 보증금으로 건네야 하는 집도 있었다.
마당 있는 집 욕심은 버리자고, 그나마 익숙한 오피스텔 재개약을 하려고 했을 때 오두막집을 발견했었다.
여기 온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고 그 운은 딱 일 년 짜리였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어제는 오두막집 주변에서 달리기를 했다.
러닝앱을 켜고 ‘런웨이와 같이하면 누구나 8주 쉬지 않고 삼십 분 뛸 수 있다’는 활기찬 멘트에 맞춰서 뛰다가 걷다가 했다.
얼결에 독서모임 친구들과 마라톤에 나가기로 한 날이 삼 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금껏 내가 가장 오래 달렸던 기록은 고등학교 체력장에서 팔백 미터 달리기를 했던 거였는데 덜컥 마라톤에 나가기로 해놓고 뭐라도 준비를 해야겠다 싶어서 큰 도로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처음 가보는 귤밭으로 걸어 올라갔다가 오던 길을 되돌아오며 뛰다가 걷다가 했다. 오두막집 어귀를 지나쳐서 맹견이 짖어대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갔더니 느닷없이 계곡이 출현했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을 지나서 한라산 영실까지 이어지는 계곡이었다.
예전에 트래킹 동호회 회원들과 헬멧 쓰고 릿지화 신고 중무장을 하고 탐험하던 서귀포 산골짜기 계곡이 집 바로 앞에 있었다니. 여름철 비 오고 나면 수정처럼 맑은 물이 콸콸 흘러서 피서하기 딱 좋았을 계곡이 바로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고, 귤밭 길을 달리기도 제대로 안 해봤는데.
쓰려던 소설은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여기를 놔두고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 그 날 저녁에 또 반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