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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빛의 미로 #4 (마지막 화)

이쯤에서 밝혀두어야 할 점은 이것 역시 나의 회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니까. 사람의 입을 거친 이야기는 핸드폰 속의 사진과 닮았다. 얼마든지 색조를 다듬을 수 있고 좌우를 뒤집어놓을 수도 있으며 원한다면 끝마무리를 바꿔버리는 일도 어렵지 않다. 나는 많은 이들이 사진을 진짜라고 믿고 추억하는 게 놀라웠지만, 굳이 그거 다 가짜라고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나름의 저승을 찾고 있을 터였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사연과 누구도 하지 않는 질문이 거기에 박제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민주가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내심 기뻤다. 우리가 이제 무언가를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섞고 나서 잠들기 전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새파란 빛이 은은하게 창문을 넘어 들어왔고, 우리는 반쯤 알몸이 되어 숨을 쉬었다. 민주가 부스럭대며 일어나 침대 옆의 서랍에서 사진을 꺼내왔다. 같이 웃었다. 그렇지, 원래 사진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지. 민주는 나에게 사진을 내밀면서도 전등은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베개를 가슴에 깔고 엎드렸다. 그리고 함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민주가 어떤 중년 여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모녀 사이 같았다. 빼다 닮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눈매나 입술이 그리고 있는 궤적이 묘하게 비슷했다. 나란히 환하게 웃고 있는 표정들이 나까지 웃고 싶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찍은 사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진은 민주가 술집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뒤에는 안개가 가득했고 그 너머로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민주는 하늘에서 찍은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도 무슨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 정말 그들이 하늘에 떠 있다는 건 잠시 뒤에 알 수 있었다. 방이 어두운 데다가 사진의 초점도 잘 맞지 않았지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민주의 어머니가 입은 조끼에 살기등등한 단어들이 적힌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굴뚝에 올라가 있었다. 민주는 옆에서 턱을 괴고 내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고공농성이 두 달이 넘었을 때였다고. 학교에 가기 전에 일찍 집을 나와서 엄마를 보러 갔어. 저곳은 바람이 많이 분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분다. 엄마의 동료들이 경고했지만, 그 말을 들을수록 꼭 엄마를 만나야 할 것 같았어.


그때 찍은 거야. 저기 빛나는 것들은 다 공장의 불빛. 민주는 거짓말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사진 속에서 그들은 봄나들이를 나간 것처럼 웃고 있었다. 이걸 왜 저승이라고 했을까. 궁금했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다 괜찮아? 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 고작 그렇게 말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민주는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네 대답을 듣고 싶었어. 내가 말을 건네는데 네가 말하지 않는 상황이 너무 불안해. 우리는 계속 말을 하는 사이였잖아. 핸드폰을 통해 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내 입에서는 그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어떤 순간의 민주에게 하는 말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침대에서 함께 누워 있던 민주인지, 내가 울린 민주인지, 지금 나를 따돌리고 이 골목의 어디에서 헤매고 있을 민주인지. 그녀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민주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의 사연이었다. 중학생 딸을 둔 여자에 대해. 직장을 잃으면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해. 재산을 빨리 차지하고 싶어서 상태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낸 이들에 대해. 죽기 전에 성당 문 앞에라도 다시 가보고 싶었던 노인에 대해.


“너 지금 성당이구나.”


“…….”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북극성처럼 바라보고 달려온 십자가가 거기 있었다.


“성당에 있구나. 할아버지랑.”


“경찰을 부를 거지.”


“아니야. 안 부를게.”


“무서워.”


민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거기로 가겠다고 말하면서. 심장이 뛰었다. 그동안 헛수고만 한 셈이었다. 위치를 대충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십자가를 기준으로 삼았는데, 왜 정작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볼 생각은 못 했을까. 이제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저기에 민주와 토마스 할아버지가 함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발견하고 나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가서 민주를 설득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민주를 설득할 수는 없을 듯했다. 지금 당장 신고할까. 성당에 요양원을 이탈한 노인이 있다고. 그렇게 하면 적어도 민주가 책임질 일은 없게 되겠지만 우리는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지금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토마스 할아버지와 저성과자 요양사와 민주와 나의 미래가 결정될 판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선택의 문제라고. 하지만 결국 고민하는 건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나는 그저 성당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음을 곧 알게 되었다. 경찰에 신고하려면 일단 전화를 끊어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민주가 울기 시작했으므로.


그때부터는 아무리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다. 첨탑 끝의 십자가는 신기루인 양 멀었다. 민주가 있는 곳으로 마구 달려가고 싶었지만, 전력으로 달려가다가도 곧 길이 막혔고 갈림길이 나타났다. 성당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고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정반대로 휘어 있기도 했다. 뜨거워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민주의 이야기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불안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말을 멈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까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가 직장을 잃는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를 두고 다른 길을 택했던 민주는 몇 분 정도 헤맨 끝에 토마스 할아버지를 찾았고,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고, 민주는 성당에 데려다줄 테니 기도를 드리고 나서 꼭 함께 요양원으로 돌아가자고 할아버지와 약속했다고 말했다. 토마스 할아버지는 자기가 멀쩡하다고 수많은 요양사에게 말했는데 다들 너무 바빠서 들으려고도 안 했대. 웃기지 않아? 농담 같지 않아? 나는 웃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웃을 수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이것도 지나고 나면 다 괜찮을 거라고. 성당이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았다. 



    

동이 트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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