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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빛의 미로 #1

민주는 저승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환하게 웃는 유년기의 얼굴 뒤로 짙은 안개가 깔려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맥주를 더 시켰다. 술집에는 사람이 많았고 종업원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마실 술도 없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민주가 지루해할 것 같아서, 사진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민주는 씩 웃더니 집에 있다고, 그러니까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대답했다. 나는 사진을 어딘가에 두고 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핸드폰에 저장해두진 않은 거야? 그 대단한 사진을. 그렇게 묻자 민주는 핸드폰 화면으로 본다면 그것은 저승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문이 묻을 수 있는 인화된 사진에만 저승이 담긴다는 것이었다. 술집에서 듣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어떤 사진이든 오래 들여다보면 저승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진 속 세상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따라서 누구도 변하지 않는다. 그날의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행하게도 그날 밤에는 우리의 모습을 찍어두지 않았으므로. 민주는 빨리 마시라고 재촉하더니 자기가 술값을 결제했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고 거리로 나왔다. 사람이 많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민주의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품에 안겼다. 취기에 오른 몸을 포개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서늘했다. 나는 예전부터 사람의 귓가에는 톱니바퀴가 있어서 제때 욕구를 해결하지 않으면 잡음이 심하게 울리는 법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대개 술을 앞에 두고 여자들에게 지껄인 말이었는데, 다들 농담이라고 믿고 웃었지만 그때마다 정말 잡음 때문에 귀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불 꺼진 침대 위에서 민주와 팔다리가 엉킨 채, 나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자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헤맸습니다. 헛수고였어요.     




그날 밤에도 조용한 곳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타인의 품에서 느끼는 정적은 아주 잠깐이었다. 나는 모든 소음이 차단된 공간을 자주 상상했다. 이를테면 사후 세계가 있다. 죽음 이후의 세상은 말한다. 지금 이건 다 장난 같은 것이다. 고생도 했고 눈물도 흘렸겠지만 너는 혼자가 아니었다. 거대한 눈이 다 지켜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사후 세계의 심판자들은—그 무시무시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삶의 매순간을 꿰뚫어본다는 점에서 인간을 위로해주는 건 아닐지. 다들 하고 싶은 말이 쌓여 있을 테니까. 나는 염라대왕 앞에서 무릎 꿇는 상상을 했다. 누구도 하지 않았던 질문들이 내 앞에 떨어진다. 너는 젊을 때 왜 그렇게 외로웠느냐. 너의 자리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것은 너의 선택이었느냐.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죽음을 함부로 상상한 죗값도 치르게 될까. 사실 민주가 술집에서 저승을 입에 올린 것도 농담이라면 아주 고약한 농담이었다. 우리는 요양원에서 일했으므로. 직장을 이야기하면 많은 이들이 기저귀를 갈아주는 장면을 상상했지만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겼다. 수백 명의 노인을 보호할 만큼 규모가 큰 곳이어서 행정직 직원도 여럿 필요했다. 온종일 물품과 재정 상태를 체크하고 직원들의 실적을 분석하여 문서로 만들곤 했다. 거기에 더해 민주는 보호자들이나 외부 단체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고, 나는 커다란 창고를 혼자 관리했다. 사무용품부터 시작해 섬유 유연제와 빨랫비누와 기저귀 등의 물건들 개수를 파악하고 배급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민주와 나는 가장 직급이 낮았다. 사무실에서의 잔소리들은 퇴근하고 나서도 고막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민주와 가까워진 이유는 그녀도 나와 같은 증상을 앓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회사가 만들어준 관계라고 할 수 있었는데, 정작 친해진 것은 회사 근처의 술집에서였다. 종이쪽지에 노래 이름을 적어서 건네주면 음반을 찾아서 틀어주는 곳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모든 노래를 요청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으나 어쩐지 60년대 록 음악만이 울려 퍼졌다. 사장님이 취향대로 신청곡을 선별하는 건지 손님들이 알아서 분위기에 맞추는 건지, 아니면 비슷한 인간들만 모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퇴근하면 그곳에서 혼자 맥주를 연거푸 마시곤 했다. 어느 날 술집에 들어섰는데 내가 늘 앉던 바에 민주가 앉아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는데 민주와 눈이 마주쳤다. 퇴근하고 들른 술집에서까지 회사 동료와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민주가 먼저 시선을 돌렸고, 나도 다른 자리에 앉아 술을 시켰다.


정면에서 마주친 건 담배를 피우러 나간 때였다. 계단참에서 창문에 대고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는데 민주가 라이터를 만지작대며 이쪽으로 왔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고 나서 아주 잠깐 침묵을 지킨 후, 언제 모른 척했냐는 듯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민주가 말했다. 담배 피우시네요? 몰랐어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흡연자이면서도 담배를 피울 잠깐의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웃음에 힘입어 대화를 나누었다. 상사 욕을 하고 싶은데 서로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는 못 하는 그런 대화였다. 담배가 평소보다 금방 타들어 갔다. 나는 인사를 남기고 들어가려고 했다. 민주가 저기요, 하고 나를 불렀다. 괜찮으시면 같이 한잔하자고 했다. 말이 잘 통했다. 사무실에서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민주는 자기 역시 퇴근하고 나서도 어떤 목소리가 자꾸 되풀이되어서 괴롭다고 했다. 그것은 팀장의 잔소리이기도 했고 민주 씨는 여잔데 꼭 남자처럼 하고 다닌다는 사무장의 빈정거림일 때도 있었다. 여기서 시끄러운 음악을 한참 동안 듣고 술에 취하면 집에서는 편하게 잠들 수 있더라고.


민주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스피커에서 60년대 록스타가 자꾸 혁명이 어쩌고 괴성을 질러대는 통에 거의 소리를 질러야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환청을 떼어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취하도록 술을 먹고 나니 우리는 반말을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고, 그때부터는 약속을 잡지 않고도 그 술집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맥주를 들이켜며 서로에게 소리를 질러대고는 목이 쉰 채로 몸을 섞곤 했다. 그날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민주의 자취방에서 팔다리가 뒤엉킨 채 잠들었다가, 허전한 감각에 잠에서 깼다. 민주가 곁에 없었다. 정신이 좀 들자 베란다에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는데, 담배를 피워문 것 같지도 않았고 전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민주가 안으로 들어와 내 어깨를 흔들어댈 때까지 조용히 자는 척하고 있었다.


“일어나봐. 빨리. 경찰 불러야 할지도 몰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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