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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등 #5 (마지막 화)

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수는 고개를 들어 누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 했지만, 머릿속을 부유할 뿐인 생각을 입 밖으로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가 꺼내려던 것은 이런 질문이었다. 어떤 이들이 우리의 눈에 이상해 보인다면, 그들에게도 우리가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그들에게는 우리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무리가 아닐까?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해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해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모두의 눈이 핸드폰 화면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누나는 다리를 떨다가 방에 들어갔고 할머니는 해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해수는 할머니의 친구에게서 온 전화임을 알았으나, 할머니에게 핸드폰을 건네지는 않았다. 자신이 통화가 끊어지길 기다리고 있음을 자각했을 때 그는 전화를 받았고, 긴장했던 것이 무안할 만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귓바퀴로 흘러들었다.     

     



“그래도 진짜였어.”


해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평소 습관대로 아랫입술을 깨문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족과 똑같은 대화를 반복할 때면 늘 그랬듯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할머니가 집에서 나간 뒤로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모든 일이 해결되었는데, 왜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간 듯했다. 해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봤지만 아빠에게서는 아직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말해주면 아빠는 어떤 얼굴을 할까. 전화를 대신 받아주는 일이 생각보다 괜찮더라고 말할 때도 해미는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그런 것은 유순한 사람이 할 일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상냥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은 착한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타인에게 괜한 기대만 품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화 통화의 특징이라면 서로 얼굴을 안 보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상대방의 표정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재밌는 점은 한창 대화 나누는 중엔 그 어떤 얼굴도 상상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말에 집중하느라 그런 걸까? 타인의 표정은 언제나 통화 도중 침묵할 때만 눈앞에 떠올랐다. 끝없는 전화와 전화 사이의 짧은 순간마다, 해미는 애정보다 증오를 더 많이 받아본 이들의 볼품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와 해수를 내버려 두고 방에 돌아왔던 순간에도, 해미는 평범한 사람이 할 만한 일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믿었다. 누구든 자신과 상관없는 일 때문에 곤란해지기는 싫은 법이니까. 그래도 곧바로 경찰에 연락할 생각은 아니었다. 방문을 닫은 뒤, 마치 누군가가 침입하려는 걸 막으려는 양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이 상황을 해결해주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신고해도 우리에게는 별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여기까지 데려온 것만으로도 처벌받는 건 아닐까? 혹시 아빠가 자신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게 있는 건 아닐까? 새하얗게 질린 그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아빠가 조금이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던 말이 사실 그 자신을 위한 거였다면…….


통화 연결음은 무한히 이어졌고, 끝끝내 아빠에게서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해미는 전화를 끊고 방바닥에 앉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닫힌 문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두 사람이 나누고 있었다. 아니, 세 사람인가. 네 사람 같기도 했다. 들은 적 없는 목소리들이 뒤엉켜 들려왔다. 닫힌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거실의 불빛을 해미는 보고 있었다. 동생이 핸드폰으로 스피커폰을 켠 모양이었다. 머나먼 시대에서 건너오는 듯 낯설고도 낭랑한 음성이라고 그때 해미는 생각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었다.


“누나.”


“응.”


“진짜로 모여 있다고 했어.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해수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해미는 테이블 너머 동생의 표정에 내심 놀랐다. 그러고 보니 동생이 화내는 꼴은 전에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잠시 눈길을 맞대다가 다른 곳을 보았다. 같은 걸 깨달은 모양이라고 해미는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선택을 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동정심 때문에 행동하진 않았다는 사실을.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숨이 다할 듯 깜박거렸다. 차라리 모든 게 어두워졌으면 했다. 사랑받는 어린아이가 잠자리에 들 때처럼 누군가가 불을 꺼주었으면 했다. 경찰이 문을 두드렸던 순간에도 해미는 방 안에 앉아 있었다. 해수가 그들을 안으로 들이자, 거실에 울리던 낯선 목소리들은 풀벌레 울음처럼 사라졌다. 경찰은 몇 마디 거짓말만 듣고도 두 사람에게 더는 질문을 퍼붓지 않았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두 사람은 한참이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시간은 차츰차츰 더 어두운 순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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