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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등 #3

그러게 왜 주제 넘은 짓들을 하는 건지……. 방에 연결된 베란다에서 세 개비를 연달아 피운 뒤, 해미는 혼자 웅얼거리며 실내로 들어왔다. 베란다 문을 닫은 뒤에야 집 안에 소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얇은 벽 너머로 해수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거실로 나가봤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수의 방문이 닫혀 있었고, 그 너머의 목소리는 딱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뭉개져 들렸다.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해수는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에게 말을 건 것 같았다. 하지만, 뭐하러? 치매 노인이 잠에서 깨면 골치 아프단 것쯤은 누구나 알 텐데. 해미는 테이블 앞에 앉아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아빠의 이야기 중 대부분을 걸러냈는데, 차라리 말해주는 편이 나았던 걸까. 어쩌면 해수는 할머니가 정말 존재하긴 하는지 궁금했는지도 몰랐다. 선한 마음에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그렇지만, 만일 그런 거였다면 더더욱 오기가 치미는 것이다. 사실 아빠가 일터로 돌아가자마자 해미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결론을 내렸다. 경찰에 신고하면 되는 것이다. 치매 노인을 데리고 있으니 와서 해결해주십시오. 어렵지 않았다. 사실 아빠도 그게 답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거라고 해미는 생각했다. 당황한 나머지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을 것이다. 아빠는 몸을 떨며 말했다. 남자들이 할머니를 차에 태우려던 순간에 대해서. 차 문 밖으로 삐져나온 앙상한 팔다리, 그걸 마치 자꾸 벌어지는 종이상자 뚜껑인 양 구겨 넣던 손아귀에 대해서. 백발에 늘 꽂혀 있던 큼지막한 머리핀이 떨어지자 저도 모르게 달려가 주워 들었던 일,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자신이 할머니의 보호자라고 말해버린 순간에 대해서……. 할머니는 몸이 떨려서 걷지 못했고, 아빠는 할머니를 안고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시선이 목덜미로 느껴졌을 것이다. 아빠는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봐야 할머니는 또 공사장으로 나타나 같은 일을 겪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작자들인지는 아빠도 아는 바가 없었다. 자신이 흥분해서 따지는데도 매끈한 낯빛으로 아무 대꾸도 않더라고 했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일 아닐까? 해미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다닐 만한 직장을 잡은 지 이제 겨우 반년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졸업하고도 버릇 못 고친 애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철거 현장에서 이른바 용역을 뛰기도 했다. 적당히만 다치게 하려고 하나 둘 셋, 수를 세며 목을 조른다는 소리를 무용담처럼 떠들던 게 귀에 쟁쟁했다. 그때 기억이 너무 강렬한 탓에 이 상황조차 극단적인 쪽으로만 상상하는 건 아닐까. 그 남자들은 사실 할머니의 집을 찾아주려다가 웬 이상한 아저씨에게 한 소리 들은, 착한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해미는 그렇기를 거의 바라는 심정이었으므로, 마침내 동생이 거실로 나왔을 때 그 표정이 썩 밝은 것이 반갑기까지 했다.


해수는 해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냉장고를 열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방문은 다시 닫혀 있었고, 할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해미는 해수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치매 어르신이라고?”


해미는 그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 아빠가 그러던데, 같은 말은 어쩐지 하고 싶지 않았다. 해수는 냉장고를 닫고 일어나 이번에는 싱크대 위 선반을 열어보았다. 언제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를 찻잔과 유리잔 따위를 하나하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그 소리 사이로 해미는 누군가가 이불 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뭘 찾는 건데. 말을 해.”


“치매 아닌 거 같던데. 엄청 멀쩡하시던데.”


이번에도 해미는 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이것도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으니까. 해묵은 짜증이 몰려왔다. 동생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뻔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게 몰아가는 사람. 고등학생 때부터 웬만하면 동생과 말을 섞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입만 바라보는 상황이 되었으니 성질이 뻗치는 게 당연했다. 해수는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고. 소리가 나지 않게끔 방에 들어갔지만, 할머니가 바짝 긴장하며 숨 들이쉬는 소리는 경보음인 양 선명히 들렸다. 그는 스스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크게 놀랐다. 낯선 사람이 잠들어 있다고는 들었지만 정말로 있을 줄이야. 해수는 자기가 침입자인 양 불도 못 켜고 횡설수설했다. 여기까지 차로 태워준 분이 우리 아빠인데, 그냥 머물게 해드리는 거니 괜한 걱정은 안 하셔도 되고,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야기를 거기까지 들었을 때, 해미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할머니 목소리라기에는 전혀 떨림이 없었다. 혹 옆집 소리는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오해 없이 전달하고자 천천히 불러주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해미는 이제 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해수에게 의구심이 담긴 눈길을 던졌다. 그는 잠시 머뭇거린 뒤 이렇게 말했다.


“친구분한테 전화하시는 거야.”


“친구?”


“친구분들이 데리러 오실 거래. 우리 주소도 몇 번 듣고 외우시던데.”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해미는 해수의 눈을 오래 마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선을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집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일본풍 찻잔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세 잔. 가스레인지에 올려둔 주전자가 침묵을 메우려는 듯 들썩거렸고, 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 속으로 녹차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해미는 해수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없어.”


해수는 한 손에 뚜껑을 든 채 주전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해미의 말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해미가 더 말을 이어가길 기다리는지도 몰랐다.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니까. 해미는 유약하고 순진한 사람을 볼 때마다 고개 드는 충동을 이번에도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다. 할머니의 친구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도 저 할머니를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이며, 지금쯤이면 아빠도 집에 데려왔던 걸 후회하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문득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부자들이 살아갈 고층 아파트, 그곳을 끝없이 배회하는 할머니를 어딘가 데려가려고 했던 남자들은 결코 착한 사람들일 리가 없었다.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잠그고 돌아오는 해수에게 해미는 입 안을 간질거리는 말들을 쏟아내려 했다. 해수의 이상할 만큼 빛나는 표정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었다. 방문이 열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문틈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뒤로 한참은 서로를 쳐다보지 못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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