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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등 #1

언젠가 해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지을 줄 아는 표정이 열 개라면, 그중 가족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서너 개뿐일 거라고. 어쩌면 인간관계란 다 마찬가지인지 몰랐다. 친구끼리는 부담스러우면 안 되고, 연애 상대에게는 추잡한 면을 감춰야 하며, 가족이랑 잘 지내려면 섭섭한 마음을 적당히 삼켜버려야 한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피곤한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열쇠 꾸러미를 쥔 것처럼 상대에게 맞는 표정을 매번 찾아야 하니까. 그래서 해수는 늦은 오후에 귀가했을 때 그 침묵이 싫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학교와 다르게 집은 언제나 고요했다. 아빠는 몇 달씩 집을 비웠고 누나도 일 시작한 뒤로 얼굴 보기 어려워졌으나, 무표정하게 혼자 보내는 밤은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와도 눈 맞추지 않을 때조차 표정을 짓기 마련이었다. 집에 불청객이 찾아온 날, 해수는 그걸 몰랐던 탓에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좀 엉뚱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친구에게 보여줄 표정과 애인에게 보여줄 표정, 가족에게 보여줄 표정이 따로 있다면,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표정은 어디로 가는 걸까? 무방비한 채로 짓는 것이기에 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 그건 결국 감정이 되어서 마음에 쌓여 있다가 언젠가 터져 나오는지도 모른다. 해수와 해미는 불청객과 함께 있는 동안 서로 많은 표정을 보여줬지만, 그중 대부분은 가족에게 보이면 안 되는 거였음을 곧 알게 될 터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부끄러운 충동을 숨겨야 하는 법이니까.

     



“너무 감상적이야.”


그날 밤, 해미는 해수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각자 생각을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해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몇 모금 들이켰다. 누나와 대화하다 보면 스키장을 역으로 기어 올라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기를 쓰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다가도 삐끗하면 원점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애초에 안 하는 게 낫다는 점에서도 비슷했는데, 그럼에도 늘 먼저 말을 붙이는 자신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감성적인 거지. 감상이랑 감성은 달라.”


“그거나 그거나.”


해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 쉬었다. 두 사람은 밤중에 거실로 나와 마주 앉아 있었다. 원형 테이블에는 담뱃갑과 더불어 물이 담긴 유리잔이 두 개 놓여 있었고, 언제 올려놓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해수의 책 한 권도 장식품처럼 자리를 차지했다. 거실에는 창문이 없었으나 빗소리는 어딘가의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모든 것이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듯했다. 한겨울에 비가 내리는 건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이 자정이 넘은 때에 거실에서 이야기 나누는 건 낯설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들은 각자 방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을 터였다. 어쩌다 말할 일이 생겨도 메신저로 한두 마디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뭐 해, 배 안 고프냐, 냉장고에 먹을 거 있냐……. 특히 요 며칠은 누나가 밤중에 밖에 나가 있기 일쑤였는데, 아빠가 출장 떠나 있는 동안에는 늘 펼쳐지는 일상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나가 어떻게 생각하든 해수는 자기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굳이 설득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쨌든 이 모든 건 아빠가 시작한 일인데, 아빠에 관해서는 방을 같이 쓰는 자신이 더 잘 알 테니까. 그들이 사는 집은 좁은 평수에 투룸을 구현하고자 방 외의 모든 공간을 비좁게 만든 꼴이었다. 현관문 열고 들어오면 정면에 방문이 두 개 보였고, 오른쪽에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와 냉장고와 선반이 마치 어깨를 잔뜩 구기고 몸을 맞댄 것 같은 꼴로 자리해 있었다. 화장실이 취사 공간과 너무 딱 붙어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화장실 문이 한 번도 닦지 않은 듯 꾀죄죄한 거야말로 집 분위기를 어둡게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두 개밖에 없는 주제에 방은 또 좁은 게 있고 넓은 게 있는데, 좁은 방을 해미가 혼자 쓰고 넓은 방을 아빠와 해수가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온갖 귀찮은 일의 시작이었다.


아빠는 건물에 전기 배선하는 일을 했고, 자기 일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걸 아들이 모르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는지 한쪽 벽에 건물 사진들을 붙여놓고 밤마다 전기에 관해 설명하기까지 했다. 전기가 어떻게 전봇대나 지하에서 사람 사는 집으로 들어오는지, 그래서 어떤 원리로 집을 짓고 난방을 하고 전등에 불을 켤 수 있는 것인지……. 희한하게 아빠는 늘 이불을 펴고 누우려는 찰나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수는 남의 집에 불이 들어오건 말건 우리 방 불부터 껐으면 싶었지만, 아빠의 말에는 함부로 끊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는 십 대 소년이 동경하기 쉬운 이른바 진짜 인생이 담긴 것 같았으니까. 노련한 숙련공만의 노하우, 그걸 자신이 인정하는 신참에게만 알려주는 현장의 법칙, 재개발 건물의 디테일을 미리 알아내고자 공사장에 숨어드는 투기꾼들. 들을 때는 지겨운 이야기였지만, 막상 아빠가 공사 지역 숙소에 몇 달간 머무는 동안이면 해수는 벽에 붙은 사진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반면에 해미는 아빠가 집을 비우면 퇴근하고 꼬박꼬박 술 마시고 들어왔다. 술집 중에도 카페처럼 쿠폰에 도장 찍어주는 곳이 있는 건가? 해수가 그렇게 물으면 해미는 픽 웃으며 담배 물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그러니 해수가 독서실에 있다가 10시쯤 집에 들어왔을 때, 해미가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즉각 알 수 있었다. 거실이래봐야 싱크대와 세탁기, 냉장고가 들어가면 테이블 하나 놓기에도 비좁았으니, 거기에 전등 하나 켜고 앉은 누나의 모습은 은근히 압도적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누나가 고3이 되는 동생에게 할 말은 공부 잘되느냐는 격려일 테지만, 그런 건 해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안 맞고 다니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모를까. 혹은 본인 체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흡연의 유해성을 경고하는 것도 할 만한 이야기 같았다. 그처럼 엉뚱한 상상을 하며 속으로 키득대고 있었으므로, 해미가 불쑥 꺼낸 말은 그에게 더욱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해미는 지금 해수의 방에 낯선 할머니가 잠들어 있으며, 그들이 당분간 데리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빠가 불과 한 시간쯤 전에 그 할머니를 직접 데리고 와서 맡겨두었다고도 덧붙였다. 할머니? 친가 쪽? 해수는 머릿속으로 아득한 가계도를 그리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해미는 그 할머니가 그들과 핏줄로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처럼 낮은, 하지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해미는 아빠가 문 두들기던 순간에 대해 설명했다. 정확히는 두들긴 게 아니라 발로 쿵쿵 찬 것으로 해미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경계심이 일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해수는 소리만 듣고 발차기와 주먹질을 구분할 줄 아는 게 웃길 뿐이었으나, 그다음에 해미가 들려준 이야기는 해수의 얼굴에서 웃음을 싹 말려버렸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아빠가 기절한 할머니를 안은 채 서 있더라는 거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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