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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죽은 시인의 하이웨이 #5 (마지막 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죠.”


“누구?”


“세상이 달라지잖아요.”


“퀴어물 많아진 거? 퀴어 로맨스, 드라마 같은 거?”


“…….”


“후배, 그런 게 많아지면 진짜 세상이 바뀌는 것 같습니까? 솔직히 그거 태반은 이성애자 보라고 만드는 거잖아. 그냥 돈 되니까 집어넣는 거 아니야.”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그 말에 나는 몇 마디 쏘아붙이려 했지만, 후배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시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울분에 차 있기보다는 그냥 지긋지긋한 기색이었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좁은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가로등이 드물어 추락사하기 딱 좋을 것 같았다. 후배는 차창 위 손잡이를 쥐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속페달에 발 붙이고 조심히 언덕을 오르려니 저절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후배, 내가 요즘에는 이런 이야기를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하는데.”


“네.”


“내가 하나만 물어볼게요. 후배는 윤동주 일기를 보고 기분이 좋았죠?”


“네?”


자동차는 힘겹게 길을 올랐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갈수록 우리 목소리도 먹먹해지는 듯했다. 후배는 한쪽 팔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품속에 아주 소중한 생명체라도 감춘 듯 몸을 꼼짝하지 않았다.


“후배는 지금 윤동주가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정체불명의 문서 하나 보고 지금 신난 것 같거든. 그거 말고는 벌써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겁니까?”


“뭘요.”


“윤동주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마음대로가 아니죠. 일기에 분명히…….”


“아니지. 마음대로지. 그 기록 하나, 그 순간만 딱 하나 보고 우리 마음대로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는 거 아닙니까.”


정확히는 네 마음대로, 네가 꿈꾸는 그 잘난 정의의 이름으로 써먹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은 입밖에 꺼내는 순간 부끄러워질 게 뻔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드러내버린 기분이었다. 어느새 언덕을 지나 평지를 달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거렁뱅이 아이 세 명이 나오는 시, 기억나요?”


내가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그 시에서 어떤 언덕 풍경을 묘사한다. 언덕에서 화자는 거렁뱅이 아이 셋을 만난다. 아이들에게 줄 것이 있을까 싶어 주머니를 뒤진다. 두툼한 지갑과 좋은 옷, 있을 것은 다 있으나 차마 나눠줄 수는 없다. 그리하여 화자는 다정한 말이라도 건네려 아이들을 부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언덕을 넘어간다.”


후배가 기억나는 대로 시를 읊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 나는요,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그렇게 세워두고 가는 것 같거든요. 그분은 계속 타인에게 닿으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던 분 아닙니까. 그래서 부끄러워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는 윤동주의 이미지만 만들어 세워두려는 것 같거든요. 이게 맞는 거예요?”


내 목소리는 이상할 만치 침착했다. 문득 스스로가 낯설었다. 분명 질문을 하는 건데도 정말 대답이 궁금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답을 미리 정해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되새기는 오랜 친구가 할 만한 말이었다. 서로의 말에 기어코 반박하려던 우리는 그 순간 관절에 힘이 풀린 듯 무너졌다. 아주 이상한 생각이지만, 우리 모두의 생각을 그러모은 것보다 훨씬 지혜로운 누군가가 내 입을 빌어 말한 기분이었다. 아주 허황된 상상은 아닐 듯했다. 오래전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생각하다 보면 그 목소리가 가끔 우리 입에서 나올 테니까. 하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드라마는 관심을 많이 받는 쪽으로, 시청자가 열광하는 쪽으로, 돈이 되는 쪽으로 만들어져 어느 플랫폼에든 방영될 것이다. 그리고 후배는 모든 과정에 실망하여 점점 더 고집 센 사람이 돼버릴 것이다. 차가운 물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 벨소리가 들렸을 때는 어쩐지 구원을 받은 듯했다.     


다시 한번,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죽은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망자가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는 기분, 혹은 비참한 결말의 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기분. 윤동주 시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의외로 일상적인 내용의 초기 작품들이었다. 생애 중후반 작품은 여러 번 읽어 익숙한데, 초창기 시에는 당시 소년의 감정이 싱싱하게 드러나 있었다. 누나가 주워 온 조개껍데기, 어미 품에 안기는 병아리들, 기왓장을 자식 그리워하는 부모로 의인화한 장면들. 제목만 봐도 내용이 떠오를 만큼 모든 시를 반복해 읽었는데도, 문학 소년의 연습장 같은 그 문장들만큼은 결코 질리지 않았다. 그가 불과 몇 년 뒤 형무소에서 젊은 나이에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치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윤동주는 법정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 조선의 독립과 자주적인 민족성 고취를 위해 행동했다고. 고통스럽고 슬픈 얼굴이 아닌, 푸른 창공을 보는 말간 얼굴로 기억되기에 윤동주의 삶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어쩌면 먼 훗날 사람들도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을까. 끔찍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전염병 같은 희망을 떨쳐내지 못하는 우리. 모르는 전화를 받자 익숙한 음성이 블루투스를 통해 차 안으로 번졌다. 선생님이었다. 제작사에서 연락이 너무 많이 와 핸드폰을 아예 꺼뒀다고 했다. 지금 별장의 유선전화로 통화하는 거라고, 할 말이 있으니 간략히 하겠다고 했다. 윤동주 일기는 애초에 가짜였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믿을 만한 감정인 다수에게 의뢰해 검증받았다고 했다. 일기의 종이며 잉크, 펜촉의 궤적 등이 그 시절 것일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거였다. 시기상으로는 윤동주가 이미 죽은 뒤 쓰인 걸로 추정되며, 누가 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소설 구상 따위가 아니었을까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냐고 선생님은 물었다. 그만치 중요한 문서라면 여태 방치되었을 수 있겠냐고. 이제 우리는 원래 쓰려던 대로 드라마를 쓰면 된다고. 제보자를 볼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그러니 별장까지 올 필요는 없다, 라는 게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침묵 속에 후배와 단둘이 남겨졌다. 거짓말이다. 이상하게 그 확신이 온몸을 휘감았다. 갓길에 차를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후배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숨바꼭질을 하듯 숨을 죽였다. 무엇에 더 화가 났을까. 내가 윤동주 일기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게 꼴보기 싫을까. 아니면 선생님과 일기를 덮자고 얘기한 게 가장 혐오스러울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화가 난 걸까. 그 마음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점이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 이제 세상에 새로운 반전은 남지 않았다는 것. 작업이 수월해질 듯해 안도감이 드는 한편, 한순간 노인이 된 듯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사람들의 갖가지 믿음과 욕망에 대해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후배와 함께 돌아갈 길이 너무 멀었다. 잠깐의 휴식, 그리고 나는 어두운 도로를 향해 차를 돌려 익숙한 세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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