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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등 #2

아빠의 모습은 여러모로 낯설었다고 했다. 조그만 할머니를 쌀 포대처럼 품에 안은 건 둘째치더라도 아빠 얼굴이 그토록 하얗게 질린 건 처음 보는 거였다. 한겨울인데도 머리칼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서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고, 그 와중에도 눈동자만은 맑게 빛나는 게 오히려 기묘했다. 해미는 일단 현관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빠는 안으로 들어와 할머니를 해수의 방에 눕힌 뒤―이 대목에서 해수는 굳게 닫힌 방문을 한번 쳐다보았다―해미와 거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때 해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서대로 온갖 질문을 아빠에게 퍼부었다. 일은 어쩌고 이 시간에 여기 와 있냐, 저 할머니는 누구냐, 무슨 사고를 친 거냐, 민간인을 감전시키기라도 한 거냐, 병원에는 데리고 간 거냐……. 해미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하게 되었지만, 기대와 달리 아빠는 한 번도 웃음을 터뜨리거나 손을 내젓지 않았고 그저 시선만 내리깐 채 앉아 있었다.


거기까지 말하고 해미는 벌떡 일어나 해수의 방 쪽으로, 그러니까 본인 말대로라면 할머니가 잠들어 있을 곳 앞으로 가서 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해수는 입을 헤벌리고 앉아 누나의 표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까지 가늘게 뜨고 방 안의 소리에 집중하는 꼴을 보니 헛웃음이 날 듯했다. 누나가 겁먹은 걸 보는 게 너무 낯설어서 그럴까? 아빠가 기절한 할머니를 안고 등장했다면 그건 심각한 일이긴 하다만, 도대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조금만 더 우애 좋은 남매였다면 해수는 이게 다 누나의 장난이라고 확신했을 것 같았다. 해미가 자리로 돌아와 아빠의 말을 요약해줬을 때도 해수는 멍하니 듣기만 했다.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웅얼거린 걸 제외하면 아빠는 딱 세 마디만 남긴 뒤 돌아갔다고 했다. 저 할머니는 공사판을 배회하던 치매 노인이고, 기절한 게 아니라 차 타고 오던 중에 잠든 것이며,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것 같으니 누구의 눈에도 띄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봤어?”


“뭐를.”


“할머니. 일어나서 얘기하고 뭐 그러는 거 봤냐고.”


해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딴소리를 했다.


“경찰한테는 절대 신고하지 말래.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래.”


“…….”


“……씨발 진짜.”


해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거실을 서성거렸다. 집의 평수에 따라 스트레스 푸는 방법도 다르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보니까 그토록 한가한 상상이나 할 때는 아니었다. 그래도 해수는 아주 심각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할머니를 아직 보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아빠가 할머니를 안고 들어올 때의 그 표정을 보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해수는 아빠가 죄짓고 숨길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또 나서서 남 도와줄 위인은 아닌데……. 그 순간 해수의 눈앞에 아빠가 묘사했던 어느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해미가 담배 피우려는 것인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해수는 그 등에 대고 할머니가 어디 다치진 않았느냐고 물었다. 해미는 냉랭한 낯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해수는 거실에 혼자 남았다. 냉장고 소음이 혼자 있을 때만 잘 들리는 것처럼, 지금 그들 앞에 얼마나 곤란한 일이 놓여 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물론, 해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알긴 뭘 알아? 방으로 들어가 라이터를 찾으며 해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생과 얼굴 마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지만, 한 번쯤 삐끗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과는 거리 두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이들은 자기 생활에 충실할 뿐 주변 사람에게 별 악의가 없기 때문에, 나쁜 마음을 먹으면 먹을수록 이쪽만 비참해지는 법이었다. 5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할 때도 해미는 동생의 순진무구한 얼굴에 화가 치밀었다. 해미가 곧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으니 학군 좋은 동네로 옮기는 거다, 라는 아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했으니까. 거짓말이었다. 중요한 건 해수였을 것이다. 중학생 되기도 전부터 공부에 소질이 보인 녀석이었고, 그런 아이의 주위에는 그 소질을 알아본 게 자신뿐이라 믿는 어른이 득실거리기 마련이었다. 아들 칭찬을 하도 듣다 보니 아빠는 우량주에 투자한 개미의 심정이 되었겠지. 그리하여 그들은 신발장과 거실과 주방이 하나로 통합된, 아빠가 주장하기로는 아늑한 전세방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한 거였다.


무언가를 미워할 때면 항상 그런 식이었지만, 해미는 서울로 오는 게 그렇게까지 싫진 않았다는 걸 학기가 시작되자 알게 되었다. 새 친구들 사귀기는 걱정했던 만큼 어렵지 않았다. 해수가 재능을 찬탄하는 어른에 둘러싸이듯 해미는 서로 비슷한 부류임을 알아보는 골초들에 둘러싸였으니까. 귀가 시간은 나날이 늦어졌다. 서울은 불빛을 무기로 한 싸움이 밤마다 벌어지는 곳이었고, 친구들과 건물 사이를 누비다 보면 아빠의 거짓말이 명백해지는 것이 통쾌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말썽을 피우고 돌아와도 아빠는 별 꾸중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지금 아빠가 할머니를 안고 돌아오게 되자, 해미는 그 시절에 아빠가 할 말이 별로 없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해미는 그렇게 뱉어놓고 평소처럼 버르장머리 운운이 돌아오길 기다렸으나, 아빠는 경험 부족한 비행청소년처럼 초조히 앉아 있기만 했다. 입을 연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할머니가 처음 나타난 게 언제였는진 모르겠지만, 모두의 골칫거리가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아빠는 말했다. 해미는 이 이야기를 해수에게 비밀로 부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빠가 일하는 현장이 여러모로 골치 아픈 곳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오래된 상가단지였는데 상인들을 내보낸 뒤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는다고 했다. 할머니가 찾아다녔다는 찻집도 그 상가 어딘가에 있었을 터였다. 거기 가면 같이 어울리는 할머니들이 있거든. 친구들이……. 할머니는 그 말을 되풀이하며 공사장 주위를 배회했는데, 겉모습만은 말짱했다. 고풍스러운 감색 코트를 입고 백발은 뒤로 묶은 채였다. 어느 흑백 사진관에서 걸어 나온 것 같달까. 처음 보는 사람은 할머니가 찾는 찻집이 정말 어디 있는 줄 알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한번은 경찰이 할머니를 데려가기도 했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이튿날에 조금 늦게 찾아올 뿐이었고,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았다. 밤에 숙소 근처를 걷던 중 정장 입은 남자들이 할머니를 차에 태우려는 걸 봤을 때, 그게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느껴진 것이 그 때문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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