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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등 #4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 순간 해수가 아빠의 사진들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벽에 붙은 현장 사진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밤중에 찍은 건물이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면 우주의 풍경처럼 보일 정도로 수많은 전등이 그곳에서 빛을 내고 있었으니까. 아빠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해수는 어둠에 관해 많은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한번은 아빠가 공사를 마친 뒤 심정이 어땠는지 말해준 적 있었다. 지금보다 젊었을 적, 처음으로 아파트 작업에 들어간 시기였다. 동료들과 나란히 팔짱을 끼고 아주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한 명이 무언가에 발 걸려 넘어지면 모두가 균형을 잃기 일쑤라, 결국 다 함께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바닥을 더듬어서 돌부리를 뽑아내야 하는 식이었다. 다들 자기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완벽한 결과물을 낳으리라는 생각은 거의 믿음에 가까웠다.


그렇게 몇 달의 일을 마무리하면 거대한 건물의 모든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날이 찾아온다. 집에 할머니가 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 그러니까 어두운 방에 들어가 연필로 스케치한 듯 윤곽만 보이는 할머니에게 말을 붙였을 때, 해수는 자신이 아빠의 말을 귓등으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해수는 아빠의 직업적 자부심이 얼마간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자부심 가지려고 노력하는 게 뻔히 보인다고 할까. 보통 사회적으로 알아주지 않는 건 둘째치더라도, 그 공사에서 생기는 수익 중 아빠에게 떨어지는 게 현저히 적은 마당에 무슨 보람을 느낀다는 말인지. 그런데도 아빠의 이야기는 비할 데 없이 감상적이었다. 아파트가 밤중에 불을 밝혔을 때, 비록 골격뿐인 형상이었음에도 훗날 그곳에 살아갈 수많은 이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고 했다.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시작되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주인공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모여들 것 같았다고.


물론 아빠란 사람이 진지한 소리를 시작하면 자식 입장에서는 얼른 대화를 끝낼 궁리만 하기 마련이었다. 그때 해수도 대답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이불 속에 몸을 누였던 걸로 기억했다. 그러니 그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못한 셈이었다.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 순간, 주인공이 아닌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와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며 해수는 차마 전등을 켜지 못했으나, 할머니가 일어나려고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책상 스탠드를 켜게 되었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것이 그때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 해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불을 켜기 전에는 이런저런 말을 떠들었는데도 막상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치매 할머니라는 말에 막연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상상했던 걸까? 할머니는 겁먹은 눈으로 해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타인이 쉽게 읽을 수 없는 복잡한 생각이 숨어 있는 듯했다.


오랜 침묵 끝에 할머니가 입을 열었을 때, 해수는 몇 초간 숨을 참고 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화를 좀 쓸 수 있느냐고 할머니는 물었다. 내 전화가 안 돼요. 예전에는 잘만 됐는데……. 해수는 몸수색이라도 당하는 사람마냥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급히 꺼냈다. 할머니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해수는 살짝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 보이고는 가까이 다가가 할머니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책상 앞 의자를 끌어다 앉아 할머니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뭐랄까, 자신을 말끔하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며칠 동안 빗과 로션을 압수당한 꼴 같았는데, 그저 자고 일어나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핸드폰을 다루는 손도 느려터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사용할 줄은 아는 게 분명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이 집 주소를 물었고,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보며 머뭇거리듯 다이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곧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흘러 나왔다.


자신이 본 걸 해수가 누나에게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예상보다 빨리 통화를 마친 뒤 거실로 나왔고, 알고 보니 치매가 아닌 것 같다는 소리를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말해줬더라도 누나의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처음 인사 나눌 때는 의외로 눈웃음까지 짓길래 역시 사회생활이 무섭구나, 감탄까지 했는데, 그게 다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임을 해수는 금세 알아차렸다. 누나는 맥주를 빠르게 마셔 취기가 좀 오른 기색이었다. 할머니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증명이라도 하고자 작정한 것 같았다. 거실로 나온 뒤로는 어쩐지 방에서보다 더 초조한 표정인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한 것이었다. 친구들이 어디 사는지 물었고 그들이 각각 어떤 사람인지도 집요하게 질문했다. 여기로 데리러 올 거라는 사람이 운전을 할 줄 아는 거냐고 놀라워했고, 어르신이 대단하시다며 또 이런저런 질문을 퍼부었다. 마지막으로 친구분을 본 게 언제인지, 자녀분들이 걱정하지 않는지, 아무리 떨어져 산다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가족들에게 먼저 알려야 하는 거 아닌지…….


“그만 좀 해.”


해수는 찻잔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내심 놀랐다. 그는 질책을 담아 속삭이듯, 도서관에서 떠드는 문제아에게 주의를 주듯 누나의 말을 끊었으니까. 그건 마치 이곳에 그들의 말을 들으면 안 되는 누군가가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해수는 공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뭇결을 흉내 낸 벽지는 군데군데 찢어져 테이프가 붙었고, 낡아빠진 주전자에서는 여전히 김이 피어올랐다. 모든 게 그대로인 듯했다. 달라진 건 누나의 눈빛뿐이라고 해수는 생각했다. 누나는 여지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매섭게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해수는 입을 벌린 채 누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초조하게 두 손을 모아 비틀며 현관문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만하기는 무슨.”


“…….”


“범죄인 걸 알고는 있지? 치매 걸린 노인네를 마음대로 데려와서 신고도 안 하는 거.”


누나의 입에서 치매라는 말이 나오자, 해수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할머니 역시 고개를 돌려 해수의 시선을 맞받았는데, 지금 오가는 말을 할머니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표정만으론 알 수 없었다. 누나는 혼잣말을 시작했다. 곧 모든 걸 털어놓게 될 거라고 웅얼거렸고, 이런 식으로 손해받는 짓은 여기까지일 거라고 구시렁대기도 했다. 해수는 여태 들은 목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누나에게 조금 더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역시 할머니가 완전히 멀쩡하다고 믿은 건 아니었다. 조금만 말을 섞어봐도 이상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꼭 머릿속에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 것처럼, 이쪽에서 무슨 말을 건네건 미리 준비된 말을 순서대로 늘어놓는 듯했다. 하지만 할머니와 통화하던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은 이상, 할머니의 말을 다 헛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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