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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죽은 시인의 하이웨이 #3

“그 사람 몇 살이라 했죠?”


후배가 잠시 말을 멈춘 틈에 내가 물었다.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후배는 이야기를 쏟아낸 끝에 입이 말라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반쯤 마시고 남은 생수를 후배에게 건네주었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


“대충 말입니다. 선생님은 그 사람 실제로 만났다면서요.”


우리는 아까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로 진입한 참이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별장에 도착할 터였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후배의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알고 싶었다. 후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줌마라던데요.”


“아줌마?”


“네, 그냥 아줌마래요. 되게 평범한.”


그냥 아줌마라니. 너무 구시대적인 표현 아닌가 싶었지만, 그 사람이 어떤 느낌일지 바로 알 것 같아서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국문학을 전공하기는커녕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다고, 오랜 기간 청소 노동을 해왔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는 책을 끼고 살았지만 가세가 기울어 오빠보다 먼저 생계전선에 뛰어든 사연이 있었다. 윤동주 일기도 불과 몇 년 전까지 집구석에 두고 살아왔다. 딸은 독립해 집을 나갔고 남편은 몇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탓에, 혼자 살 집을 알아보며 짐을 정리하게 되었다. 원래는 할아버지 것이었다가 할머니의 유품이 된, 이제는 자신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몇 꾸러미의 고서적들. 유품이라 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은 옷장 맨 아래 칸 서랍에 넉넉히 들어갈 만큼 부피도 작았다.


“그래서 그걸 갑자기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읽으려던 건 아니었겠죠. 짐 정리하다 보면 이건 왜 여기 있나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냥 오래전부터 당연히 거기 있던 물건들, 그런 걸 보면 문득 이렇게 낯선 물건을 가만히 두고 살아왔구나 싶으니까요. 그래서 훑어보다가 빠져든 거 아닐까요.”


나는 피곤한 눈을 부릅뜬 채 운전대를 고쳐 쥐었다. 고속도로 운전은 단조로운 일이다. 전조등에 비치는 창백한 차선들을 보고 있으면 꼭 쳇바퀴에 갇혀 있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 말고 다른 차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후배는 윤동주 일기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사적인 물건이 되었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 일기를 읽을 때부터 그게 윤동주가 쓴 거라고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 유품이니 할아버지 일기일 거라 짐작했고, 그 사람은 마치 부모의 졸업앨범을 훔쳐 보듯 조금은 장난스럽게 읽어나갔다. 한자가 많아 읽기엔 불편했지만 금세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백 년 전 학생이 쓴 일기인데, 사람의 솔직한 마음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학생과 복도에서 엇갈리는데 인사를 못 건넨 자괴감, 하교길에 넋놓고 강물을 보느라 늦게 귀가했다는 이야기, 온 세상이 자신의 시 쓰기를 방해하는 것 같다는 자의식마저도.


“일기를 꽤 열심히 읽었대요. 딸은 결혼해서 나가고 남은 가족은 없고, 일도 퇴직하고 지내던 중이라고 하니까.”


“그래서 계속 본인 할아버지 일기인 줄 알았던 겁니까?”


“그게, 그랬으면 차라리 좋을 수도 있었는데.”


후배는 척 봐도 일부러 하는 기침으로 시간을 끌었다. 이제 보니 후배는 이 이야기를 내심 즐기는 듯했다.


“그분이 이상하다고 느낀 지점이 뭐였냐면, 종교였대요. 그분 할아버지도 전쟁 전에는 꽤나 잘사는 집 도련님이었다 보니, 일기에서 학생 때 시인을 지망한 건 그러려니 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일기에 기독교적인 신앙고백이 거의 식전기도처럼 반복적으로 나오더라는 거죠.”


“할아버지는 종교가 없으셨군.”


“그냥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들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윤동주 스타일은 아니시네. 그래서 그게 윤동주 일기인 걸 알았다는 거죠?”


“엄청 울었대요.”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후배는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자꾸 반복되는 구절이 있어 검색해봤고, 그래서 윤동주 시인 일기라는 걸 알았다고 해요. 사실 윤동주라는 이름을 보고도 누군지 바로 기억난 건 아니래요. 시나 소설 같은 건 손에서 놓은 지 너무 오래됐고,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배운 게 바로 떠오르지도 않았으니까요.”


“청소 일 하는 분이라고 했죠?”


“네, 윤동주 시를 인터넷에서 읽고 엉엉 울었대요. 너무 많은 걸 잊고 산 거 같아서.”


이어지는 후배 이야기를 나는 점차 넋을 잃고 듣게 되었다. 그 사람은 윤동주 일기 실물을 줄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전체 사본도 제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메일로 질문하면 관련 부분만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며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궁금한 건 윤동주의 시 전반에 깔린 부끄러움, 자기 비판이 어디서 시작되었지에 대해서였다. 교과서는 그게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라고 이야기한다. 조국을 잃어 서럽고 불의에 맞서지 못해 스스로 부끄러운 거라고. 하지만 그가 일제강점기 현실에 대해서만 쓴 것도 아닌데, 그 뿌리 깊은 자기 성찰을 오로지 시대 상황에 연결 짓는 건 무리한 해석 같았다. 내가 작업실에서 토론하며 느낀 한계도 거기 있었다. 우리가 아는 윤동주는 별로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고 가진 걸 항상 친구들에게 나눠줬다는데, 일제에 항의하여 요주의 인물이 되기도 했는데, 왜 끝없이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시를 썼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선생님은 윤동주의 시 세계가 잘 드러난 대표작 몇 편을 골라 그 시가 창작될 당시로 추정되는 시기의 일기를 살펴보기로 했다. 일기를 가진 그 사람과는 이메일로 소통하던 끝에 긴 통화를 하게 되었고, 이윽고 그 사람이 밤중에 우리 작업실로 찾아와 격렬히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후배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 표정이 뒤틀렸다.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우리의 창작에 관여하는 걸까. 윤동주 일기가 설사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걸 갖고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지 않나. 윤동주의 삶에 대해 권위자처럼 행세할 수는 없지 않나……. 윤동주 일기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물려받았을 뿐이고, 한 시인의 삶을 자신이 독점할 수는 없는 거였다.


“선생님은 그때부터 글을 엄청 즐겁게 쓰셨대요.”


“그럼 왜 도망가신 겁니까.”


“너무 좋은 작품이 나와서, 그래서 일기를 무시하고 쓸 수가 없으셨대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곳에 있는 것처럼, 후배는 자기 말을 천천히 이어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처음 꺼낼 때 그랬듯이 지금도 한껏 초조하고 들뜬 기색이었다. 나는 후배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비로소 윤동주가 입체적인,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대중성은 모르겠지만, 작품성은 탁월한 작품을 쓰는 기분이었대요. 자는 시간도 아까웠대요. 꿈속에서도 윤동주의 고향 땅을 거닐었대요. 그런데 그냥 꿈 같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이상한 말인데, 선생님은 자기가 백 년 전의 사람들이 일러주는 대로 글을 쓰는 것 같다고 했어요.”


“비유겠지. 그 정도로 몰입했다는.”


“아뇨, 말 그대로요. 선생님은 정말 과거의 사람들에 이끌려서 글이 저절로 써지는 것 같았다고 하셨어요. 감히 그만 쓸 수가 없어서 계속 썼다고 하셨어요.”


“…….”


“그런데 윤동주가 짝사랑했던 사람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일기에서요.”


그 대목에 이르러 후배는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오래 주저하지는 않고 곧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중학생 때 윤동주가 좋아했다는 선배에 대해서. 인사조차 제대로 건넨 적 없지만, 꿈속에서는 며칠이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하여 어쩌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혼자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고 했다. 주변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터놓기 어려웠던 감정 때문에 종종 울었다고 했다. 윤동주가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에 대해, 후배는 꼭 자기가 겪은 일처럼 찬찬히 설명했다.


“여자가 아니었다는 거죠.”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무심하게 후배와 나 사이를 가득 메웠다. 후배는 아주 먼 곳에서 내 말을 수신하는 사람처럼 시차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다시 한번 후배에게서 확인을 받고 싶었다.


“윤동주가 어릴 때 좋아한 사람이.”


익숙한 악몽을 다시 꾸는 것처럼, 내 귀에 온갖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윤동주를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 하는 대형교회 목사, 동성애를 포용하는 일은 신사참배와 같다고 떠들어대는 광신도, 동성애자라는 말 자체를 욕으로 쓰며 살아가는 머저리들……. 시청자들이 분노하며, 동시에 신이 난 채 양산할 논란과 그 논란을 받아 쓴 싸구려 기사들이 벌써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드라마에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건 한순간도 나오면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 어쩌면 명예를 훼손했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 심지어 법정에 서고 처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들 것이다. 모든 이슈에 한마디씩 말을 얹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 몇 트럭은 있으니까. 물론 환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후배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그가 조금은 기대에 차 있음을 나는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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