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별장에서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강원도에 있는 통나무집으로, 선생님이 글이 안 써질 때 머무는 곳이었다. 늦은 오후쯤 서울에서 출발하면 약속 시간에 대충 맞을 듯했다. 나는 집에서 차를 끌고 나와 후배를 데리러 갔다. 작업실에 틀어박혔을 때는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는데, 막상 후배랑 단둘이 장거리 운전할 생각을 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동료 사이가 으레 그렇듯 내가 후배에 대해 아는 건 의외로 많지 않았다. 행동거지로 보면 나보다 열 살은 어린 것 같은데 사실 두 살 어린 것, 옷이 얼마나 많은지 날마다 패션이 새로운 것, 그럼에도 역대 신입 중 가장 오래 버티고 있는 것뿐. 신문 기사, 잡지, 트렌드 분석. 우리가 일주일에 읽는 자료만 인쇄해 쌓아놔도 웬만한 회사 파티션 높이는 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우리더러 아침 사과를 먹듯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했다. 대중의 마음을 읽어야 좋은 작품을 쓰고, 그래야 작가로서 존재가 증명된다는 거였다.
우리는 아침에 사과 따위를 챙겨 먹을 만큼 한가롭지도 못했고, 존재를 증명하니 어쩌니 하는 말을 들으면 하품을 참느라 턱근육에 무리가 올 지경이었다. 후배와 나는 직장인처럼 아침 9시까지 작업실로 출근했지만, 직장인과 달리 퇴근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채 자료를 조사하고 대본을 썼다. 물론 작업보다 힘든 건 그동안 선생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거였다. 사회생활이란 결국 윗사람의 콤플렉스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회의 시간은 늘 자유로운 토론을 가장한 정답 맞추기 놀이였다. 다른 드라마―물론 잘나가는 드라마―의 흥행 요소를 분석하다 끝나곤 했다. 선생님은 평론가들의 글을 육포처럼 씹으며 우리는 엘리트가 아닌 대중을 위해 글을 쓰는 거라고 거듭 말했다. 실은 그냥 돈이 좋은 게 아닐까 싶다가도, 흥행 포인트와 매력적인 캐릭터, 얼마간 무시해도 좋은 개연성에 관해 설명을 듣다 보면 왜 선생님이 성공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저 커피가 아직 안 나와서요.”
후배가 기다리는 어느 도넛 가게 앞에 도착하자, 후배는 내 차창에 머리통을 들이밀고 그렇게 말했다. 주문한 커피 기다리느라 차에 탈 수 없다는 거였다. 붐비는 도로변이었다. 내 뒤 차량들은 내가 일 초라도 정차해 있는 걸 견디지 못해 경적을 울렸다. 나는 결국 후배의 커피가 준비될 때까지 인근 도로를 뱅뱅 돌고 있어야 했다. 족히 십 분은 더 지나고 나서야 후배는 보조석에 올랐다.
“미리 좀 사두시지.”
“아, 그럼 식잖아요.”
후배는 벌써 도넛을 하나 입에 물고 옆에서 뒤척였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빼빼 마른 후배는 빵처럼 부풀어 오른 패딩에 파묻혀 있었다.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는 패딩 주머니에서 각종 과자와 도넛, 빵을 주섬주점 꺼내 좌석 옆에 내려놓았다. 나는 운전하는 틈틈이 후배가 사 온 내 몫의 커피를 힐끔거렸다.
“이게 내 겁니까?”
“그쵸.”
“이거는 아이스인데.”
“그쵸?”
“…….”
나는 더 말하지 않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커피 속 얼음들은 침묵 속에서 캐럴이라도 부르듯 달그락거렸다. 후배는 뭐가 불만인지 모르는 눈치로 이쪽을 곁눈질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난 며칠의 혼란한 상황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별장에 가 선생님을 만나면 뭐든 해결이 되겠지. 언제나 그랬다. 선생님은 계획이 있었고, 나는 그 계획을 따라 이 자리까지 왔다. 우리는 금세 한강 다리를 건너 강남으로 접어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장난감처럼 보일 고가도로와 교통표지판들. 운전할 때면 가끔 이 모든 신호와 차선이 프로그램처럼 단번에 지워지는 상상을 했다. 선생님이 왜 그토록 사람을 피하고 칩거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물끄러미 보면 사회적 약속은 하나같이 장난감 같아 보이니까. 우리의 안전장치는 언제든 힘없이 끊어질 수 있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빨아 마시며 괜히 눈앞의 빨간불을 노려보았다.
후배가 깊은 한숨을 쉰 것은 우리가 서울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고속도로에 오르자 높은 건물들은 점점 멀어졌고, 시퍼런 하늘이 그만큼 시야를 가득 메웠다. 왠지 더 추워진 것 같아 히터를 높였다. 내비게이션은 앞으로 쭉 직진이라는 말을 이따금 반복했다. 밤이 깊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주 늦은 시각 같은 건 도로에 다른 차들이 적어서일까. 이대로라면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전에 도착할 듯했다. 나는 커피 빨대를 껌처럼 씹으며 운전하고 있었다.
“선배.”
창밖을 보던 후배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혼자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도넛까지 두어 개 끝장낸 마당에 우울할 리는 없을 듯했다.
“왜요.”
“선배는 선생님 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밑에서가 아니고…….”
“아, 그렇죠. 공동창작이시죠.”
“…….”
후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것 같았다. 지금 같은 일이 자주 있었냐고 묻고 싶겠지. 시민단체 출신의 스타 드라마 작가, 쉬운 이야기를 쓰는 대중 친화형 이야기꾼, 그럼에도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 은둔형 유명인……. 언론이 말하는 선생님의 면모는 대체로 사실이었으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난처할 때가 많은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담아낸 전기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윤동주가 남긴 시들이 어떤 사연으로 창작되었을지를 추적하여 역사적으로 고증된 사극을 만드는 것. 내로라하는 국문과 교수들 자문을 받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윤동주를 그려낸다는 데서 기대를 모은다, 는 게 보도자료에 나온 설명인데,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드라마를 게재하기로 한 국내 플랫폼이 직원들을 퇴직금도 안 주고 해고했으며, 육아하는 여성 직원들을 잘라낸 이슈가 불거진 거였다. 사람들은 인터넷에 분노를 쏟아냈고, 선생님도 그 플랫폼을 보이콧하겠다며 집필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우리가 전화를 해도 안 받았는데, 그럼에도 후배와 나는 날마다 작업실에 나와 자료 조사를 이어갔다. 일은 당연히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백수가 되었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으니까. 며칠 뒤, 선생님 소식을 제작사를 통해 전해 들었을 때는 좀 섭섭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제작사 말단 직원이 작업실을 박차고 들어와―전화나 이메일로 연락하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는 말이다―이번 주말에 우리더러 선생님을 만나러 가라고 했다. 선생님이 강원도 별장에 있고 우리랑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일단 가서 어떻게든 설득해내라는 거였다. 자기들 말은 절대로 듣지 않을 테지만 후배 작가들 말은 듣지 않겠느냐면서. 제작사는 이미 선생님을 설득할 방안까지 자료로 만들어두었다. 플랫폼 노사교섭 현황, 대중의 관심 추이, 타 플랫폼과의 계약 가능성 등을 문서로 만들어 내 손에 쥐여주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선생님이 정말 우리를 보고 싶어 할지 어떨지도 모른 채로 도로를 달리는 거였다.
“저런 게 도움이 될까요?”
후배는 내가 대시보드에 대충 놓아둔 제작사 자료를 턱짓했다.
“뭐,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선배, 원래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하세요?”
“…….”
“좀 이상하잖아요. 플랫폼이 나쁜 짓을 했다, 그러면 그냥 문제를 해결하면 되잖아요? 굳이 연락까지 두절하고 별장으로 가버릴 건 또 뭐예요.”
나는 거의 다 녹은 얼음을 입에 털어넣고 사탕처럼 혀로 굴렸다. 일일이 대답해줄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후배가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