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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꿉 #5 (마지막 화)

왜 사람들은 꼭 서로의 눈을 보고 대화하는 걸까? 세준은 언젠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유명한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수잔은 그가 엉뚱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게임하듯 대답을 궁리했고,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잔은 이렇게 말했다. 얼굴엔 감정이 드러나니까. 그래서 다들 상대방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 살피며 대화하는 거라고. 세준은 그 말을 듣고 한참 대답이 없었다. 우산을 들고 좁은 골목을 걸으며 두 사람은 침묵했다. 이윽고 세준이 입을 열었는데, 수잔은 그때 그가 한 말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거였다. 세준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 눈을 피하는 건 약자가 하는 행동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눈을 못 피하는 게 아닐까? 약해지는 데는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오기 어렵거든. 수잔은 세준의 얼굴을 올려다보기 두려워졌다. 우산을 든 팔을 꼭 감싸 안을 뿐이었다.


타인의 말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때, 수잔은 남의 물건을 빌려 와 돌려주지 않은 듯 찝찝할 때가 있었다. 정작 그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쪽에서 그의 속마음을 멋대로 간직한 셈이지 않나.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렇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채버렸으니,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지. 2층에서 세준의 비밀을 알아버린 순간에도 수잔은 크게 동요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빠삐가 어둠 속에서 상자를 긁어대고 있으니 거기 든 걸―장난감일 줄 알았다―꺼내주려던 거였는데, 박스를 뜯어 핸드폰 불빛을 비추어보니 학위논문 표지에 금빛으로 인쇄된 학생들 이름이 묘비명처럼 드러났다. 그때부터는 가히 직업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별 감정도 없이 상자를 파헤쳤다. 사실 기자로서는 이런 갑질 사례에 대해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었고, 여자친구에게 숨긴 것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문제는 박스 밑바닥에 깔린 동물보호증이었다. 빠삐의 보호자로 세준이 등록되어 있는 거였다. 이게 무슨 뜻이지? 수잔은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엉뚱한 것일 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교수가 자신의 개를 돌보게 시킨 거 아니었나? 그렇다면 이 개는 교수의 개여야 할 테고, 세준은 최근에야 이곳에 억지로 와서 일하는 걸 텐데. 아, 교수가 세준을 아예 자기 개의 법적인 보호자로 등록하게 한 건가? 하지만 굳이……. 수잔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1층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빠삐는 그걸 신호탄 삼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수잔은 그제야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걸음으로 올라오는 세준과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는 건 전적으로 수잔의 생각이었다. 2층은 그때까지도 어두웠다. 세준은 몇 걸음 앞에서 수잔이 자신을 마주 쳐다보고 있음을 몰랐고, 눈살에 힘을 주고 고개는 쭉 뺀 채 점차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수잔에게 필요한 것은 명쾌한 해명뿐이었다. 세준이 평범한 피해자이기만 하면 수잔은 모든 걸 이해해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지도교수 심부름을 하고, 어쩔 수 없이 개를 돌보며 대소변을 닦고,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여겨 가까운 사람에게도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면. 수잔은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꼭 대피로를 훤히 꿴 비상요원처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준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대학원이 얼마나 치열한 정치판인지 열변 토하는 동안에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세준은 이 바닥에서 한 자리 얻으려면 줄 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교수가 시키는 일만 해서는 안 되고, 시키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까지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교수가 혼자 사니까 자기가 적극적으로 반려동물을 마련해드렸다고, 이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거의 윽박을 질렀다. 수잔은 세준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게 처음인데, 하필 이런 이야기라 슬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준이 입을 다문 건 핸드폰 진동을 느낀 순간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간헐적으로 울리고 있었지만, 변명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 못 느낀 모양이었다. 세준은 핸드폰으로 온 메시지를 읽으며 침을 삼켰다. 무슨 재미있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중간중간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기도 했다. 그동안 수잔은 세준의 발목 뒤에 숨은 빠삐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세준은 곧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


“잠깐만 1층으로 가줄래?”


수잔은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곳에서 세준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이제는 다 알았으므로. 끔찍한 일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 싶은 욕구, 잘 안다고 여긴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는 공포, 동정심을 억누르려는 마음―그 모든 걸 단번에 느끼느라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듯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건 세준의 표정에 언뜻 희망이 보인단 점이었다. 수잔은 고개를 젓고, 들고 있던 동물등록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세준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빠삐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등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조명을 밝게 켜둔 게 후회스러웠다. 헤어지는 순간은 어두워야 할 것 같았다. 수잔은 1층 전등을 하나하나 끄며 놀라울 만큼 빨리 마음을 정리했다. 가까운 미래에 이 순간을 돌이켜보며 무엇도 그리워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후회도 하지 않을 거였다. 나는 솔직했으니까. 그렇게 수잔은 주택에서 빠져나왔고, 그녀가 떠난 어둠 속에서는 사진 찍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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