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규민 Nov 18. 2022

단편소설_ 소꿉 #4

많은 대학원생이 그런 것처럼, 세준은 대학원에 가면 큰일 난다는 잔소리를 학부 때부터 질리도록 들었다. 스스로 대단히 고된 길을 걷고 있다고 믿는 선배, 다음 세대에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늘어놓는 것이 취미인 어른들. 세준에게는 이게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거창한 발견이나 역사에 남는 영광을 꿈꾸지는 않았다. 그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온종일 연구에 매진할 자그마한 공간을 갖고 싶었다. 교수와 짧은 통화를 하면서 그는 덤덤했으나, 전화를 끊고 나서는 가슴이 뛰었다. 몇 분간 길가를 서성였다. 얼른 주택에 들어가야 했음을 곧 알게 될 터였지만, 그 순간은 불행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교수가 미래를 이야기한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교수는 그간 너무 미안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빠삐를 전문적으로 돌볼 사람부터 찾아보겠다고, 그동안의 은혜는 꼭 갚겠다고 했다. 은혜, 은혜. 세준은 비밀번호 외우듯 그 말을 웅얼거렸다.


그때 세준이 시간을 끈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 순간 수잔이 2층 박스 속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몰라서 한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들뜬 기분을 가라앉혀야 할 듯했다. 지금 이 기분대로 수잔을 마주하면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털어놓고 싶어질 테니까. 사실 세준이 지체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통화는 잠깐이었고, 핸드폰을 손난로인 양 꼭 쥐고 실실대던 것까지 합해도 기껏해야 10분이었다. 세상 어떤 연인도 그 짧은 시간에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택에 들어가자 눈이 부셨다. 거실 전등을 다 켜둔 모양이었다. 세준은 있는 줄도 몰랐던 전등까지. 현관문이 닫히고 바깥 소리가 툭 끊기자,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으로 갔다. 수잔은 거기 없었다. 세준은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그건 마음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테이블 위 피자와 와인은 수잔이 이 집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단서 같았다. 오늘만 잘 지나면 된다. 오늘만 지나면…….


세준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는 수잔에게 치부가 드러날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짜증이 치밀었다. 계획대로라면 두 사람은 지금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 교수와 통화하며 느낀 행복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세준은 얼른 수잔을 찾아 함께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계단에 떨어진 수잔의 사료들을 발견했을 때, 2층에서 빠삐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와 그에게 몸을 부볐을 때, 세준은 최악의 상황이 목전에 왔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남의 집에 침입한 듯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우스운 일이 벌어지는 걸 상상했다.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거나, 수잔이 1층 어딘가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거나, 갑자기 세준의 등을 쳐 놀래키며 깔깔 웃는다거나……. 뭐가 되었건 수잔이 2층에 올라가지는 않았기를, 만일 올라갔어도 박스를 뜯어보지는 않았기를 바랐다.


세준은 계단을 다 올라 2층의 어둠을 눈앞에 두었다. 주위의 모든 것은 그가 얼른 페이지를 넘기길 기다리는 듯 고요했다. 세준은 계단 아래를 돌아봤다. 빠삐는 꼬리에 힘을 잔뜩 준 채 1층에 남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준은 덩달아 긴장하여 전등을 켜지 않고 어둠을 응시했다. 당연히 그 행동에는 아무 의도도 없었다. 그저 불을 켜기 두려웠을 뿐이다. 그 어둠 속에서 세준을 일방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수잔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고려한 적 없었다. 사실 세준은 수잔이 정말 저 앞에 있을 거라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1층에서 도둑처럼 살금살금 돌아다닌 것, 계단을 서서히 올라온 것, 긴장한 얼굴로 2층을 들여다본 것―그 모든 행동이 수잔에게는 소름 끼치도록 낯설어 보일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그의 머리는 고장 난 컴퓨터처럼 한 가지 질문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박스에 담아 2층에 옮겨놓은 물건들을, 수잔이 전부 다 봤을까?


그때부터 세준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앞에 놓인 역할을 차례차례 수행할 뿐이었다. 벽을 더듬어 전등을 켜자, 우선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박스에 온 신경이 쏠려서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었다. 무슨 압수수색이라도 당한 것처럼 테이프가 거칠게 뜯겨져 있었고, 안에 담겨 있던 학위논문 몇 권은 아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이걸 왜 열어보지? 남의 집에서 테이프로 밀봉된 박스를 보면 그냥 둬야 하잖아? 그런데 왜 함부로 열어보는 거지? 세준은 그가 포장한 물품을 처음 보는 양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학위논문, 너무 어려운 책들, 상장, 그리고…….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세준은 애초에 왜 모든 걸 숨기려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빠삐가 어딘가 바라보며 짖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수잔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그는 이상할 만치 당당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세준은 수잔의 호기심 많은 성격이 단점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래 마주친 그 순간, 여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스처럼 가득 찼다. 어쩌면 불행이란 모두가 너무 성실할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교수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한번 빠삐의 발톱을 깎고 나서 괜히 뿌듯한 마음에 빠삐 사진을 찍어 전송해줬는데, 교수는 그때부터 틈만 나면 사진을 보내달라고 메신저로 요구해왔다. 세준은 문득 사람들이 자신에게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에 올라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왜 수잔은 여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까? 진실을 밝히기만 하면 세상이 덩달아 밝아질 거라 믿는 그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수잔은 그를 쭉 지켜보고 있었음을 과시라고 하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쪽 손에는 무언가 작은 카드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세준은 그 물건을 과녁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나를.”


그 말은 수잔이 꺼낸 거였지만, 침묵이 팽팽히 이어지는 동안 세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준은 늘 이런 순간을 상상해왔다. 그의 상상 속에서 수잔은 꼬치꼬치 따지거나 화를 냈는데, 그것도 낙관적인 시나리오였다. 지금 앞에 있는 건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세준은 왜 처음부터 수잔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수잔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말을 이었다.


“여기 동물등록증에 말이야…….”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 왜 오빠 이름이 있어?”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수잔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세준은 그녀가 피식 웃는 걸 보았고, 그 순간 스스로도 무서울 정도로 수잔이 증오스러워졌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입 안에 맴돌던 까칠한 말을 정말 내뱉을 뻔했다. 세준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교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 짤막한 몇 마디를 읽고 세준은 눈앞의 광경을 다시 한번 보았다. 빠삐는 당신이 불청객임을 알려주겠다는 듯 수잔을 향해 맹렬히 짖었고, 수잔은 팔짱을 낀 채 빠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준은 방금까지 온몸을 휘감았던 분노와 긴장감이 뱀처럼 스르르 풀려 나가는 걸 느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본 적은 없었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이전 03화 단편소설_ 소꿉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